휴직을 하고 일본에서 2년간 지내는 동안 여행을 많이 다녔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가족 여행을 다녔는데, 추운 겨울이 되니 생각나는 게 일본열도 최북단에 있는 아키다(秋田) 여행이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가운데 스키를 탔는데,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어 리프트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아키타는 워낙 추운 곳이고 눈이 자주 오기 때문에 인공설(雪)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도 별로 없는데다 눈이 억수로 오니 스키를 타기 더 힘들었다. 잘 닦여진 코스가 아닌 울퉁불퉁한 자연 그대로의 코스인데다, 스키를 타본 지 꽤 오래 됐기 때문에 초–중급코스도 부담스러웠다.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딸은 처음 스키를 신어본 탓에 내가 일일이 가르쳤다.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왔는데 일이 터졌다. 스키장에서 군만두와 포테이토칩을 먹은 게 탈이 났는지 둘째가
병원엘 가야 하는데 다자와코 시내엔 야간에 문을 여는 병원이 없다고 했다. 의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형편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한다. 결국 오후 8시쯤 택시를 불러 20km 떨어진 가쿠노다테(角館)시립병원까지 가야 했다. 전화를 했더니 그곳도 전문의가 없다는 이유로 야간엔 어린이 환자를 받지 않는데, 도쿄에서 왔다고 하니 “할 수 없다”며 받아주겠다고 했다.
눈길을 헤쳐 병원까지 가는 20분 동안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딸이 택시 안에서 몸부림과 함께 아프다고 고함을 쳐대는데, 딸의 통증을 내가 느끼는 것처럼 참기 힘들었다. 20분이 그렇게 길 수가 없었다. 열심히 배를 문지르며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택시비 1만엔(13만원)을 주고 응급실로 들어갔지만, 당직의사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감염에 의한 배탈이라는 진단과 함께 정장제를 줬다. 일본 병원은 항생제 처방을 아주 조심스럽게 한다. 탈수증이 걱정돼 링거를 맞혔다. 응급실 침대가 없어서 병원 당직실 옆의 조그만 방 침대를 이용해야 할 정도로 시설이 낙후된 병원이었다.
병원에 있어봐야 별로 할 게 없었다. 통증이 어느 정도 멎은 뒤 다시 택시를 불러 호텔로 돌아왔다. 나도 아내도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했지만 배가 고프질 않았다. 복통이 사라지니 이번에 열이 올랐다. 38.3도까지 열이 나서 밤새 물수건으로 닦아줘야 했다. 아침에 미음을 조금 먹이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 그때서야 소아과 전문의 처방을 받아 해열제와 항생제를 받았다.
그런데 해프닝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사건 2막은 아키타 시내 리치먼드호텔에서 벌어졌다. 저녁을 먹고 노래방까지 갔다가 즐거운 기분으로 9층 방에서 잠이 들었는데, 새벽 3시쯤부터 화재 경보가 계속 울리기 시작했다.
복도로 뛰어나가니, 직원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큰 딸을 깨워 옷만 따뜻하게 입게 했다. 간단히 돈만 챙겨 방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는 움직이지 않았고, 내부 계단은 어디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결국 방 바로 앞에 있던 외부 비상구를 통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잠에서 깨지 않은 둘째는 내가 안았다. 날씨가 꽤 추운 날이었다.
호텔 로비로 가니 20여명이 대피해 있었다. 방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도 꽤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술에 취한 투숙객 누군가가 10층의 화재 비상벨을 눌러서 벌어진 일이다. 웃기는 것은 그렇게 오랫동안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호텔에서는 소방서나 경찰서에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매뉴얼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의 호텔에서…
화가 난 어느 투숙객이 “벨 누른 놈을 당장 찾아오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직원들은 “미안하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엘리베이터가 작동될 때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고 했다. 다시 둘째를 안고 계단을 통해 9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호텔은 체크아웃할 때 “미안하다”며 호텔요금의 약 1/6에 해당하는 3000엔을 위로금조로 돌려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