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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민온 이유는 한국에서의 온갖 스트레스 및 불규칙한 생활로 인해 갑작스런 초기 위암 진단을 받아, 수술후 다행히 초기라는 결과를 받고, 여러 생각 끝에 서둘러 캐나다로 이주해 왔다. 캐나다의 의료보장 제도를 이용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 생각은 암 재발시의 병원비가 제일 걱정이었다. 의료보험으로도 해당 되지 않는 많은 특수진료와 병원치료비들, 또 병원비등으로 처가 당할 금전적인 어려움,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모든 짐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게 될까봐 , 캐나다의 의료보장제도를 이용할 목적으로 서둘러 캐나다로의 이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이민 답사겸 밴쿠버 및 토론토의 교민사회를 둘러본 것이었다. 교민들 모두들 한결 같이 어려움을 토로하셨다.. 아침일찍 들러본 한인교회에서 "저희 한인 교민들을 살려주시옵소서" 하는 이구동성의 절규에 가까운 기도 소리를 듣고 얼마나 많은 갈등을 했는지 모른다. 어떤 분은 나의 이민생각에 쌍수를 들고 만류하고 싶다했다. 뵙는 교민분들마다 주관섞인 부정적인 견해 뿐이었다.

투숙하고 있는 모텔방에 가서 많이 고민했다. 가족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이민오고자 하는 것이 , 오히려 가족모두를 더 심한 고생의 길로 잘못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 갑자기 생각난 것이, 내가 만난 여러분들외에 카나다에서 소위 성공한 교민들의 반응은 어떨까 궁금했다. 내 결정에 채찍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전화번호부등, 여러 경로를 통해 8-9분들과 전화통화도 해보고, 만나 뵙기도 하였는데, 그들 대부분의 이민에 대한 생각들은 거의 모두 매우 긍정적이었다. 많은 힘이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이민을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힘을 실어준 기회는 이러하였다.

밴쿠버의 작은 모텔에서 소위 "답사" 를 하고 있던 즈음, Front desk 에 근무하던 ,필리핀 분이 책을 들고 밤새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것 저것 궁금하던 차에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분 말씀이 본인도 이민자라면서 자기가 본 이민은 "잃는 만큼 얻는 것이다" 라고 자기나름의 정의를 내려 주었다.

이민을 오게 되면서부터 잃는 것이 많이 있다. 친구관계, 직장, 익숙한 한국말, 문화, 관습, 하다못해 한국말로 보는 TV 드라마, 친구와 한잔하는 포장마차에 이르기 까지… 거기에 카나다 생활이 시작되면서 얻게 되는 것들이 있다. 새로운 문화, 자연, 교육제도, 의료등등… 따라서 이민자가 카나다에 발을 내 딛는 그 날이 캐나다에서 얻게될 플러스(+) 와 한국을 떠나오면서 잃게 되는 마이너스(-) 해서 제로(0)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로 부터 일년 살면 1 살, 2 년 살면 2 살… 그 만큼 새로운 생활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민의 환상이 한국에서의 모든 credit 을 다 지키고, 덤으로 얻을 카나다의 그 무엇을 추가로 바라게 되는데에서 많은 갈등이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겐 제로(0) 부터 시작한다는 이민자의 삶에 대한 도전의욕이 생겼다. 최소한 내 결정에서 더 손해보고 시작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 다음에 캐나다의 삶이 플러스가 될지, 마이너스가 될지는 한국에 있든 캐나다에 있든 자기 할 탓이라는 일종의 도전정신이었다. 더구나 내게는 캐나다의 의료제도의 큰 혜택이 있었으니 오히려 선택상의 큰 잇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을 떠날 때, 늙으신 어머니께서는 정말 많이 우셨다. 나도 얼마나 울었는지… 자주 뵙지 못한다는 생각이, 꼭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으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공항까지 가는 길에 정말 많이 울었다. 그 많은 시간을 같이 했던 사랑하는 부모님, 자주 찾아 뵐수 없는 그분들을 두고 나몰라 떠나가는불효에 대한 미안함, 새로운 이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등등, 눈이 퉁퉁부어 가족들과 남들이 볼까봐 공항내에서는 고개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고생한번 안한 33 살의 처 와 그에게 엎혀 잠들은 1살짜리 아들 이안, 내 손을 꼭 잡고 연실 두리번 거리던 5 살짜리 아들 영민. 이들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두려운 책임…

우리 일행은 짐 가방을 밀며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통과해, 세관을 지나 한발 한발 새로운 삶, 막연한 미지의 세계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96 년 10 월부터 시작된 우리의 이민생활은 6 개월 간 록키 산맥의 아름다운 재스퍼를 거쳐, 우연히 들린 밴쿠버 아일랜드의 나나이모라는 인구 8 만의 아름다운 항구도시에서 비로서 시작되었다. 이민생활에 대한 처음의 부푼 희망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면서 수입은 없고, 나름대로는 시장조사를 하는 시간이라 자위를 하곤 했지만, 놀면서 몇천불씩 쑥쑥 빠져나가니 괜시레 마음이 급해지고, "다른 이민자들과 특별히 다를 것 없지 않느냐" 는 내 자신에 대한 평가가 점점 낮아지더니, 이민자의 선호 5 대 직종중에 하나라고 하는 식당업이 내 여력과 제일 적합한 것 처럼 생각되기 시작했다.

여러 이민선배분들로 부터의 조언과 또 늘 꿈꾸어 왔던 내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은 욕망에 수프와 샌드위치, 커피등을 파는 작은 카페자리가 나온 것이 있어 둘러 보았더니, 내 능력으로 해 볼만한 것 같기도 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가 바로 앞인데다가, 인수금액도 적당하여 남들 다 잘된다는 일본및 한국식당을 염두에 두고 인수를 하였다. 주변 호텔들의 한국인 관광객 투숙률도 매우 고무적이었다.

나나이모에는 한인가족이 몇명 밖에 되지 않아, 밴쿠버 한인신문에 광고를 통해 오신 주방장님과 , 나름대로 식기구입이며 영업허가등 영업을 위한 행정준비가 진행이 되던중, 개업을 일주일 가량 남겨놓은 즈음 갑작스러운 주방장의 퇴직으로 하는수 없이 내 처가 주방을 맡게 되면서 소위 고생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주방의 변화에 고민하다가, 짧은 시간내에 새로운 주방장을 구할 방도도 없고, 또 식당을 하게 되면 주인이 내용을 아는 것도 좋겠다 싶어 서울의 유명호텔들의 지인들을 통해 한식 레서피들을 팩스로 받고 , 시험삼아 시식회를 통해 맛을 보고, 또 여러가지 다른 조리법을 통해 현지고객들의 반응에 따른 선호도별로 레서피들을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는 등 온갖 정성을 쏟았다. 내 계산상으로는 나나이모 현지인들이 한식에 대한 경험이 없으니 이들에게 서서히 한식을 소개하는 2-3 년동안, 주변호텔의 주 50 명이 넘는 한국관광객들을 이용하여 보자는 계획이었다. 그 후에는 영업전략을 바꾸어 단체보다는 부가가치가 높은 지역고객들을 공략할 셈이었다.

그러나, 개업을 한 그 첫해부터 한국에 IMF 가 불어닥치더니, 한국 관광객의 그림자도 보기 힘들어 질 정도가 되었다. 아직 현지인들의 한국음식 홍보가 덜 된 상태에서 한국관광객 마져 볼 수가 없으니 매상은 곤두박질 하기 시작했다. 서둘러 지역방송국 라디오 DJ 도 초대해 보고, 라디오방송국 프로그램의 퀴즈에 식당 상품권을 제공하여 방송을 타보기도 하고, 신문기자들에게 기사거리 제공을 겸한 식사대접도 하고, 식도락전문 잡지의 기자들에게 기사의뢰, 고객들의 명함 및 이메일 을 통한 직,간접 홍보등을 동원하여 이벤트 행사를 갖기도 하였으나, 현지인들의 오랜 입맛을 바꿔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설상 가상으로 도시를 우회하는 새로운 고속도로가 나기 시작하면서, 내 업소가 위치한 다운타운은 그야말로 하루가 다르게 점포들이 문을 닫고 나가는 기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식당의 경비를 어느 정도 지탱할 정도의 수입이 유지가 되어 여러명의 종업원들의 도움을 받게 되면 그렇게 까지 힘이 들지는 않았을 것이나,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점점 줄어드는 매출때문에 겨우 외국인 종업원 두명과 함께 주방을 맡고 있는 내 처는 거의 혼자서 초인적인 힘을 쏟았다. 몸무게 43 kg 밖에 안되는 작은 체구에 상업적인 경험이라곤 없던 처는 혼자 김치담그고, 온갖 반찬 다 만들고, 수시로 장보고, 중간 중간 아이들 pick-up 하느라 나갔다 오고… 밤중에는 파김치가 되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정말 베겟잎도 많이 적셨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린 아들 둘은 참으로 착하게 자라주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도 잘하고, 친구들도 많아지고,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들간에 칭찬을 받으며 내가 이상적으로 바라던 밝고, 맑은 어린아이들로 자라주었다. 큰 아들놈은 국민학교를 다니므로, 학교에 보내면 되었으나, 작은 아들놈은 아직도 day care 에 맡겨놔야 했으므로 비용이 만만치 않았지만, 적은 수입덕분(?)에 정부에서 day care 비를 직접 지불해줘서 무료로 다닐 수 있었고, 또 방학시에는 아이들이 맘놓고 뛰어 놀 수 있도록 아침부터 오후 5 시까지 하는 아이들 프로그램비용도 대신 지불을 해주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저녁때에는 우리 부부가 어쩔 수 없이 식당에 나가 영업을 해야했기때문에 그 당시 6~7 세 이던 큰 아들놈은, 혹시라도 주변사람들로 부터 안좋은 이야기라도 듣게 될까봐, 자기 보다 4 살 어린 동생을 참으로 잘 돌봐주었다. 자기가 보고 싶은 TV 프로그램도 동생이 울까봐 양보해주고, 또 징징대고 울기 시작하면 우유를 타서 먹이기도 하고, 위험한 것 만질까봐 계속 따라다니면서 “얼르고, 달래며” 그렇게 큰 아들의 노릇을 해 주었다.

식당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들놈들 둘이 놀다지쳐 이쪽 저쪽에 누워 자는 것을 침대에 옮기던 어느날 이젠 사업정리에 대한 결심을 해야겠다 다짐을 했다. 그 때까지는 쓰러져 가는 사업을 어떻게든 다시 일으켜보고자 하는 욕심에 아무런 결정도 못하고, 오히려 사업에 끌려가는 처지였으나 , 잘못된 결정이라도, 결정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것 보다는 낳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그래서 가게를 부동산에 헐값에 내어 놓고, 수입원이 될 만한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어느날 내 처가 식당에서 갑자기 배를 잡고 뒹구르는 것이었다. 서둘러 식당문을 닫고,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이것 저것 검사하다가, 맹장염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에 병원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수술실에서 병실로 옮겨진 처는 병원에서 한 일주일간을 지내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문을 닫아 놓아야 할 뻔하였으나, 참으로 고맙게도 내 처가 없어 식당의 운영이 불가한 것을 알고는 , 식당 주변 단골 카나다인들이 서로 돌아가며 문을 열어주기도 하고, 대신 영업을 봐주고, 잘 알지도 못하는 김치찌개, 비빔밥등을 엉성하나마 만들어 영업을 지속하게 해주었다. 하챦은 동양의 이민자에게 식당을 통해 얻은 많은 캐나다친구들 및 교회식구들이 꽃을 들고 병문안을 와주어 완괘를 빌어주었다. 우리 동네의 주치의는 어느새 알았는지 우리 가족 병력이 있는 챠트를 들고 아침마다 다녀가기도 하고, 간호사와 의사들은 우리 처의 한정된 영어를 얼마나 참을 성 있게 들어주던지…

식당의 수입이 적어, 의료보험도 정부에서 면제를 해주어 내심 고맙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병원에서 일주일간 마치 “호텔처럼 룸써비스 시켜 먹듯이” 하다 돈 한푼 안내고 퇴원하려니 뭔가 죄짓고 도망나오는 듯하여, 우리끼리 뒤통수를 극적거리며 거리며 서로 웃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식구는 내 이민사유이기도 한 의료혜택을 참 많이 받았다. 나는 내시경하러 매년 한번씩 가는데, 병원에서는 나를 수술대에 눞혀놓고 한 15 분정도만 잠깐 전신 마취를 시켜주어 한국에서의 생짜로 내시경 호스를 삼켜야 했던 고통스런 불안을 말끔히 씻어주었다.

우리 큰 아들놈도 맹장으로 입원하고, 나 또한 담석으로 수술도 받고…

그러나 병원에서의 기억은 의사, 간호사들이 모두 참 친절하다는 점이다. 내 옆 침대에 있던 다리를 절단했던 할아버지 환자분은 밤낮 없이 수시로 간호사를 부르는 벨을 누르는데에도 한마디 불편한 표정이나 불손한 태도 없이, 대소변을 받아주고 농담을 주고 받는 것을 보고, 나 혼자 괜히 미안해 한번도 벨을 눌러보지 못했던 내 자신의 각인된 선입견에 스스로 웃은 기억도 난다.

식당을 하면서 만난 귀중한 인연들, 수많은 도움들로 인해 많은 격려와 힘을 얻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겨울철 눈이 매우 많이 쌓인 도로에서 운전하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도로를 넘어 도랑으로 빠져 어쩔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난 연세 70 정도의 캐나다 할머니 한분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차에 체인을 걸어 내 차를 빼내어 주느라 한 시간 이상을 기진맥진하다 시피하고도, “연락처라도 알려달라”고 하던 내게 ‘당신이 내 도움에 고마워 보답하는 것은 당신과 나 사이의 일로 끝이 나지만, 나에게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다른 어려운 처지의 사람에게 되돌려주고, 또 그런 도움이 한사람 한사람 반복되면 세상이 밝아진다’며 끝내 주소를 마다하며 돌아서시던 고운 할머니,

나의 갑작스런 담석수술로로 인해 식당과 아이들을 혼자 다 떠맡게 될 아내 걱정에 아이들만이라도 한국에 보내 친척들에게 봐달라고 해야겠으나 비용때문에 고민고민 하고 있을 즈음, 소식을 듣고 온 단골고객 부부, 마이클 과 카밀라, 가 내어놓은 아이들의 한국 왕복 비행기표, 크리스 마스가 가까운 어느 저녁, 다른 곳과는 다르게 한산한 우리 식당에서 불고기를 시켜먹은 단골고객 부부가 떠나고 나서 쪽지와 함께 발견된 $500 불이 들은 봉투, 미국에 살고 있는 내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Jack 과 지원이 부부의 눈물겨운 송금 등등…

그렇게 어려운 이민생활 4 년째, 기울어가는 사업과 구직의 노력이 병행되던 어느날 , 우연히 한 대학에서 내 전공을 필요로 하는 구직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정말 조바심내며 여러가지 선별과정 및 인터뷰를 거쳐 다행히캐나다 대학교에서 International Student Advisor 라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장사도 안되는 가게를 누구에게든 나 몰라라 넘기고 싶지 않아, 주인과 협의하에 가구 집기등으로 교체하는 조건에 그대로 문을 닫아버렸고,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곳 캠룹스로 직장을 따라 이주하였다. 이민올 때 가져온 돈, 나의 평생 저축금이 4 년만에 전부 날라가고 완전 깡통 찬 셈이었다. 아직도 bankrupt 시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크레딧카드 빚들을 갚아나가고 있지만.다행히도 사업을 하다 손실이 생기게 되면, 정부에서 그 손실분이 제로(0) 가 될 때까지 연말정산하여 세금을 되돌려주니 참 고마운 나라다.

캐나다에 와서 얻은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다. 특히 가족내의 화목과 행복의 가치기준의 새로운 발견은 우리가족에겐 바꿀 수 없는 재산이 되었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아이들은 엄마가 따로 키우는 것인줄만 알았다. 식사의 준비도, 빨래도, 설겆이도, 청소도 모두 당연한 아내의 일이었고, 그저 남편의 몫은 집에 돈 벌어다 주는 것, 집에 들어와 잠자는 아들들 한두번 귀여워 툭툭 치고, 공부 잘하는 것을 확인해 주는 것으로 사랑을 표현한다고 알았었다. 친구및 동료들과 밤늦도록 술마시고 노는 것만이 재미이고, 친구관계의 끈끈한 유지인줄만 알았다. 가족들과는 그런(?) 재미가 없으니 당연히 집 밖에서 삶의 재미를 찾고 살았었다.

내 처는 지금 캠룹스 Ramada Hotel Front Receptionist 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생활만 생각하면, 그래도 힘든 일일 것이나, 우리 식당을 하면서 하도 힘들어 본 경험이 있는지라, 지금은 너무나 편하다며 재미있어 하고 있다. 일하면서 영어도 많이 늘어 좋다고 하고, 아이들이 학교가고 난 시간에만 일을하고 ,우리 식구 모두 오후 시간과 주말을 함께 할 수 있으니 아이들도 참 좋아한다.

지금은 내 처나 ,우리 아이들이나 지금이 우리 생활중 제일 행복한 것 같다고 서로 느끼고있다. 아직도 재력과는 먼 관계이나, 시간이 지나가면서 행복의 가치기준이 합리화되어가고, 그에 따라 돈을 많이 들이지 않아도 인생을 즐겁게 살 수 있는 우리 기준의 행복을 찾은 탓이라 생각한다.

주말이면 어린 아들들과 호숫가도 거닐고, 캠프장에서 칠흙같은 밤, 텐트에서 나와 아이들과 함께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별을 같이 세기도 하고, 스키장에는 자주 못가지만, 그 주변 통나무로 불을 떼워주는 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무료 눈썰매도 타고, 여름철이면 배는 없지만 호숫가 주변에서 낚시를 던져보기도 하고, 처와 6살 10살 난 아들들과 함께 서로에게 기뻣던 일들, 서로에게 미안했던 일들, 바라는 일들을 캠프장의 통나무불꽃에 둘러앉아 대화로 나누며 더 낳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내게는 운전중 방심하여 단속경찰에 걸려도, 어린 아들과 처 앞에서 다 아는 변명이나, 속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고, 버스탈 때 적은 돈을 절약하기 위해 아이의 나이를 속이지 않게 되는 곳, 한국에서 잠시 들른 한국 어린아이들의 폭력에 괜스레 몇대 맞고, 왜 때리는지 어리둥절해 하는 순진한 내 아들들이 있고, Costo membership card 를 다른 한국분에게 빌려써도 들키지 않았다고 자랑삼아 얘기했던 것이 죄책감이 들게 하는 곳, 해당도 안되는 discount pass(할인권) 를 만들기 위해 습관적으로 아무생각 없이 해당자에게 대신 하나 만들어 달라고 했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생각나 무안하게 되는 곳, 한국에서 당연시 위반하던 질서와 위법이 미안한 일이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곳, 그래서 아이들에게 질서는 지킬수록 편한 것이고, 그 질서를 한두명씩 위반하여 씨스템이 무너지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 고통이 우리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에 질서는 지킬수록 좋다는 의식을 자연스레 심어 줄 수 있는 곳, 그것으로도 "삶의 만족"이 됨을 깨우칠 수 있는 곳이 내게 와닿는 캐나다 이다.

10살 짜리 어린 아들의 친한 학교친구들이 집에 놀러오는 바람에 점심먹다 당황스레 창문을 열고 김치냄새를 빼내려고 어수선 할 때, “Dad, They are my best friends. They don’t care what we eat at home. You know, you should respect others like you want to be respected, right? So don’t worry and finish your lunch, dad. (아빠, 얘들은 나랑 제일 친한 친구들인데, 내 진짜 친구들은 우리집에서 내가 먹는 것 가지고 뭐라고 안그래. 선생님이 각자의 문화에 대해 존경해 주랬어)” 하며 장난스럽게 김치도 먹이고, 된장찌개도 먹여보는, 구김살 없이 당당한 우리 아들들이 자라고 있는 곳. 내게 캐나다는 더 이상 암의 재발로 부터 내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아도 되는 곳, 적은 수입이지만 가족과 함께 하는 많은시간으로 부터 "행복" 을 느끼게 되는 곳, 그것을 내 인생관으로 정착 시킨 곳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이민정착 사례가 일반적 부의 축적이라는 의미의 성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의 식구들에게 가장 절실했던 의료혜택의 보장, 가족내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는 시간의 소중함에 대한 새로운발견, 그들과 같이 하는 시간들로부터 얻어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랑, 서로의 이해, 아름다운 추억, 아내와 아이들과 보낸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 시간들, 위법하지 않아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질서의식의 생활화, 그로 인한 편안함, 상대적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등이 이민와서 새로 깨달은 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이민의 결정 때문에 고민하시는 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가족끼리 둘러 않아 인생의 우선순위를 매겨보시고, 그 우선 순위가 캐나다가 제공하는 많은 부분에 맞다고 생각되시면, 우선순위에서 밀린 다른 것들은 좀 잃으실 생각하시고 실행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모든 결정에는 잃고 얻는 것이 동일한 무게로있음을 기억하시고, 아무리 잘한 결정이라도 100% 잘된 결정은 있을 수 없으니 후회하실일이 생기시면, 오히려 더욱 노력하시고, 이민 결정을 한탄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잘한 선택으로 바꾸시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시어 본인의 인생을 일구어 나가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나의 가진것의 많고 적음 때문에 남을 의식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상대 빈곤 의 의식에서 벗어나면 행복이 도처에 있다.

이민생활을 하면서 "캐나다는 이렇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렇다, 이민생활은 이렇다, " 등등으로 일반화하여 말씀드릴 수는 없다. 어떤 면에서든 "일반화" 시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곳 캐나다도 한국과 마찬가지고 사람사는 사회이니, 좋고 나쁜면, 좋은 사람 나쁜 사람들이 공존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다수를 특정짓는 카나다만의 사회분위기는 분명히 있는 것 같다. 어떤 이민자분들은 그 사회분위기가 본인들의 기대치에 맞지 않거나, 적응하는데 어려움이 계실터이고, 그것이 우리 식구에게는 다행스럽게 잘 적응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아들들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한다. 어떤 한국분들은 자녀들이 완전한 카나다인으로 자라주길 원하는가 하면, 어떤분들은 완전한 한국인으로 기르고자 하지만, 나와 내처의 바램은 우리 아들들이 "한국의 문화와 관습의 뿌리를 지닌, 또 그한국문화를 선호하는 카나다인(Canadian who has a preference of Korean culture)" 으로 자라주길 바란다. 그게 가장 바람직한 캐나다에서의 이민후세의 방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아침도 우리집 강아지 "캔디"를 데리고 밖에 산책을 나가며, 동네 주변에 캔디의 "잔해(?)"를 그냥 두면 안된다며 비닐봉지를 찾아 들고 나가는 순박하고 맑은 나의 어린아들들을 보며 흐뭇한 마음으로 나의 이민기를 적어 본다.

2001 년 어느날, Kamloops 에서…

1 Comment

  1. moonkoo

    2004년 8월 20일 at 5:00 오후

    참 행복이 무언가를 느끼게 했읍니다. 감사합니다. 영원히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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