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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만주족 깨어나다 - China Inside
만주족 깨어나다

만주족 깨어나다/2007.5.19 조선일보 ‘WHY’섹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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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족 여성들의 전통복식>

지난 3월18일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한족(漢族)에 동화된 만주족들이 언어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만주족 언어가 사멸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중국 동북부 헤이룽장(黑龍江)성 산자쯔(三家子)의 고립된 마을에 살고 있는 80대 노인 18명만이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뿐, 만주어의 사멸은 시간문제”라며, “그렇게 되면 청나라 문헌 200만 건도 해독이 불가능해 영원히 수수께끼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강력한 전제군주국가인 청(1616~1912)을 건설하고 3백년 가까이 중국 대륙을 지배한 만주족.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인구는 1000만 명으로 장족(壯族·약1300만) 다음으로 많지만, 만주어 전용 신문이나 방송을 갖지 못했고, 후세들을 위한 정규 학교도 없다.

인구 200만의 조선족이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초·중·고와 대학을 세우고, 여러 개의 언론기관을 운영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불과 50여 년 사이에 만주족은 뉴욕타임스의 보도처럼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일까.

그러나 물밑으로 만주족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만주족 젊은이들이 인터넷에 자신들만의 사이버 커뮤니티를 열고, 만주어 강습과 역사 문화교육에 나서고 있는 중이다. 이들은 지난 3월말 베이징 한복판에 만주어 무료교실도 열었다. 단순히 언어 교육에 머물지 않고, 한족 위주로 서술된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편다.

지난 3월31일 오전 9시, 베이징 시청취(西城區)의 한 전문학교 교실에 20~40대 남녀 20여명이 모였다. 교실 칠판에는 꽈배기 모양의 꼬불꼬불한 글씨가 씌어있고, 학생들은 “나, 나, 나”하며 선생님의 발음을 큰 소리로 따라 했다.

이 강좌는 NGO단체인 ‘뚱쩐나란(東珍納蘭) 문화전파중심’과 인터넷 사이트 ‘만주의 하늘(滿洲的天空)이 공동으로 개설한 무료 ‘만문(滿文·만주어)기초교학반’이다. 작년 3월에 이어 두번째다. 중앙민족대학 소수민족언어문학학원 내 강좌를 제외하고, 민간이 만주어 강좌를 연 것은 드문 일이다.

강좌에 참석한 왕모(25)씨는 “어릴 때부터 나 자신이 만주족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변에 만주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어 접촉할 기회가 없었다”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손으로 만주어를 써보면서 나 자신의 뿌리를 발견한 느낌이다”고 말했다.

강좌를 듣는 사람은 대학생 중에는 만주어를 배워 만주어 사료 번역작업에 참여하려는 의욕도 보이고 있다. 강좌를 개설한 ‘뚱쩐~중심’의 리단(李丹·29) 대표도 만주족 청년으로, 매혈(賣血)로 에이즈에 감염된 농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NGO활동을 하면서 우리 민족의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만주어를 몰라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만주족을 위한 인터넷 사이트인 ‘만주의 하늘’을 알게 된 뒤 운영자인 왕숴(王碩·24)씨와 힘을 합쳐 이 강좌를 열었다”고 말했다.

다니던 설계회사에 사표를 내고 만주어 강의를 맡고 있는 왕숴씨는 헤이룽장 하얼빈 출신으로 대학 시절 만주어 연구자에게서 말을 배웠다. 그는 만주어를 더 배우기 위해 조만간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시보(錫伯)족 자치현으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시보족은 만주족의 일파로, 청나라 강희제(康熙帝) 때 신장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팔기군(八旗軍) 병사들의 후손이다. 약 17만 명에 달하는 이들은 한족 생활권과 떨어져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만주어와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주의 하늘’처럼 인터넷에서 만주어를 가르치는 통칭 ‘만주족 네트’는 중국 전역에 20여 개에 달한다고 일본 아사히(朝日)신문이 최근 보도했다. ‘만족고향네트’란 사이트는 광고회사에 다니는 우스보(吳思博·28)씨가 2003년 친구 3명과 만든 것. 매년 회원이 1000명씩 늘어나, 현재 4000여명에 달한다고 아사히는 전했다. 사이트는 회원들이 수집한 민족문화 자료와 만주어 학습교재 등을 공개하고 있다. 우씨는 “도서관에나 가야 접할 수 있는 자료를 인터넷에서 간단히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자기 민족의 위대함을 깨닫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중앙정부가 만주족에 대해 차별정책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북경대학 역사학부 쉬카이(徐凱) 교수는 “전국에 만주족 자치현과 자치향이 7개 있으며, 이곳의 만주족들이 교육이나 취업에서 아무런 차별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앙민족대학의 황유복(黃有福) 교수(조선족)는 “만주족은 교육에서 오히려 우대를 받았고 이들은 과거에는 민족분류에서 ‘한족’을 선택했으나 요즘은 ‘만주족’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교육의 우대란, 북경대학·청화(淸華)대학 등 일류대학들이 일정한 숫자의 소수민족 출신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말한다. 소수민족 출신은 ‘쿼터’ 덕분에 일류대학 가기가 그만큼 쉽다.

또 상해(上海)에 거주하는 강희제(康熙帝)의 8대손인 진헝웬(金恒源·63)씨는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만주족 자치현인 모란을 방문한 적이 있다”면서 “국가 최고 지도자가 소수민족 자치현을 찾은 것 자체가 만주족을 중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만족고향네트’에서 알게 된 만주족 청년들 사이에서는 ‘중국의 역사를 만주족의 시각에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들이 제기하는 ‘역사왜곡’의 대표적 사례는 남송의 악비(岳飛)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다.

악비는 남송의 장수로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금(金)에 철저히 저항하여 중국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인물. 이에 대해 만주족들은 “만주족을 중화민족의 하나라고 한다면 결국 금과 남송의 전쟁은 내전인데, ‘내전’에서 싸운 악비를 어떻게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비판한다. 이 주장은 동북공정의 역사관과도 맞닿아 있다. 청말의 농민반란인 태평천국의 난은 ‘중국 혁명의 선구’로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멸만흥한(滅滿興漢)’의 구호를 내걸고 수많은 만주족을 살해한 잔학행위는 은폐되어 있다고 이들은 지적한다.

강희·옹정제(雍正帝)에 관한 책을 썼다는 진헝웬씨는 “지난 4월 CCTV의 백가강단(百家講壇)에서 강희제에 대해 강의한 내용 중 틀린 것이 많다”면서 “이는 베이징의 중앙당안관(黨案館)과 대만의 당안관에 있는 수많은 만주어 사료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만주족 청년들의 민족의식 회복은 앞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까. 중국만학회(中國滿學會) 얜충녠(閻崇年) 회장은 “민족의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젊은이들”이라며 “민족의식이 강해진다고 해서 티벳족이나 위구르족처럼 한족과 충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주족은 오랫동안 한족 문화와 잘 융합해 왔다”고 그는 강조했다.

만주족 사회에 부는 변화의 바람은 미풍(微風)이다. 하지만 역사의 변화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었다./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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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말기 중국을 쥐고 흔든 서태후>

<만주족은?>

만주족은 원래 백두산과 중국 흑룡강(黑龍江) 사이를 무대로 활동하던 수렵민족이었다. 시대에 따라 숙신(肅愼)·읍루(邑婁)·물길(勿吉)·말갈(靺鞨)·여진(女眞) 등으로 불린 이들은 수천 년 동안 팽창과 축소를 반복하며 주변국을 괴롭혔다.

고려시대 여진족들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까지 내려와 고려 주민들을 약탈하자, 고려는 윤관을 보내 이들을 격퇴하고 9성을 쌓은 일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기여했던 여진족은 16세기 말경 스스로를 만주(滿洲)라 불렀으며, 17세기 들어서는 큰 세력으로 성장했다. 1616년 누르하치(努爾哈赤)는 만주족을 통일한 뒤 후금(後金)을 세웠고, 그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바꾸었다.

홍타이지는 명(明)을 정복하기 앞서 배후의 위협세력인 조선을 두 차례 정복, 조선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당시 인조(仁祖·1595~1649)는 광해군의 유연한 외교정책을 버리고 반금친명(反金親明·금에 반대하고 명과 친교함) 노선을 천명하다 전쟁을 초래했다. 두번째 전쟁인 병자호란(1636~1637년) 때 인조는 20만 대군을 몰고 온 홍타이지에 굴복, 남한산성을 내려와 삼전도(三田渡·서울 송파구 삼전동 석촌호수 부근)에서 ‘세번 무릎 꿇어 절하고 아홉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跪九叩頭)’ 치욕을 당했고, 조선은 청의 ‘신하국가’로 전락하여 수많은 여자들이 만주로 끌려갔다. 최근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은 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타이지를 계승한 순치제(順治帝)는 1644년 북경을 점령해 한족 왕조인 명(明)을 무너뜨렸다. 17~18세기 청조는 평화와 번영을 구가해, 이 시기 중국 인구는 1억5000만 명에서 4억30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지배하고 강성한 다(多)민족 국가를 이룩한 배경과 관련, 한양대 임계순(任桂淳) 교수는 저서 ‘청사(淸史)-만주족이 통치한 중국’에서, 귀순한 몽골·한인(漢人)·조선인들까지 중간계층인 자유기인(自由旗人)으로 편입한 팔기(八旗)제도를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만주족 정권은 서구 열강의 도전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고, 공산중국 출범 후 만주족들은 ‘죄인’인양 숨 죽이고 살았다./지해범 중국전문기자

4 Comments

  1. 퓰리처

    2007년 5월 21일 at 11:21 오전

    요즘 만주족의 조선 점령기인 "남한산성"을 재미있게 읽었지요.   

  2. 지해범

    2007년 5월 21일 at 11:28 오전

    소설가 김훈이 몇년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심리를 묘사한 ‘칼의 노래’를 내더니, 이번에는 ‘병자호란’ 얘기를 썼습니다. 아마도 다음은 6.25에 관한 소설을 쓰지 않을까 싶군요. 김훈은 민족의 절체절명의 위기를 되짚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한민족의 민족성’을 낱낱이 해부하려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싶군요.   

  3. 乙人

    2007년 5월 21일 at 8:10 오후

    지해범님,
    좋은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구화의 과정 속에서 멀리서 들릴 듯 말 듯한 또하나의 작은 톱니바퀴가
    막 연결되어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셨군요.

    다양성과 한데 어울어짐….

    추천 올립니다. 스크랩은 안되나요?

    약간 다른 이야깁니다만, 우리도 역사논쟁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그러면서 대북 정책과 통일 논리에 대한
    역사적 비판이 꼭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한 개인의 생각을 국가 정책으로 추진한다는 건? 웃어야 할지….코미디?

       

  4. 지해범

    2007년 5월 23일 at 10:45 오전

    우리 역사학계에서 여진족(만주족)에 대해 더 연구해야 할걸로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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