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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청년들이여 안중근을 닮아라!”

"중국 청년들이여 안중근을 닮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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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

‘흙모래 대지를 휩쓸고 바람은 노하여 울부짖는데/ 칼날 같은 흰 눈이 흑룡강 연안에 쏟아진다/ 다섯발자국 지척에서 피 흘리게하여 대사를 마쳤으니/그 웃음소리 저 산의 달보다 높구나/ 장하다 그 모습 해와 달마냥 빛나리.’

중국 근대의 대표적 정치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가 지은 ‘추풍에 덩굴이 끊어지다(秋風斷藤曲)’란 글이다.여기서‘덩굴(藤)’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가리킨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입헌파인 양계초는 한국과 일본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면 내 무덤 의사의 무덤과 나란히 있으리’라고 하여 안중근에 대해 최대의 존경심을 표했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소식이 중국에 전해지자 중국 신문들은 “중국의 원수를 갚았다”며 기뻐했다. 상해(上海)에서 발행된 ‘민우일보’는 10월29일자 논설에서 ‘고려의 원수는 우리의 원수다. 삼한에 사람이 있어 일본이 (만주로) 길게 내뻗은 팔다리를 꺾었다. 비록 한인이 자기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지만 역시 우리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닌가’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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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

상해의 신주(神州)일보도 11월1일 논설에서 ‘이토의 피살 소식은 오대주를 진동시켰다. 강권도적 이토가 저격당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은 오늘 활개를 폈다’고 보도했다. 하와이의 중국신문인 ‘자유신보(自由新報)’는 10월27일 ‘고려불망의(高麗不亡矣·고려는 망하지 않는다)’란 글에서 ‘세계의 강권자 이등박문이 조선 지사의 손에 죽음을 보고 기쁨과 슬픔을 느꼈도다. 세계인류가 점점 자유독립의 참 이치를 아는 것이 기쁨이요, 중국에 사람 없음이 조선만 같지 못한 것이 슬픔이로다’고 하여 중국인의 각성을 촉구했다.

중국의 지식인과 혁명가들도 안 의사의 쾌거를 높이 평가했다. 중국의 국부로 불리는 손문(孫文)은 ‘(안중근의)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라며 극찬했고, 학자 겸 혁명가인 장태염(章太炎)은 안 의사를 ‘아시아 제1의 의협(義俠)’이라고 불렀다.

장태염은 특히 이토의 만주 시찰 때 청나라 관리들의 비굴한 행동과 안중근의 당당한 모습을 대조하여 “괴수 이토가 요동반도를 지나가자 청나라의 총독 이하 관리들은 모두 개미떼처럼 몰려나와 길가에 엎드린 채 황제를 배알하듯 절을 했다. 안중근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지만 쓸데없는 말이란 한마디도 없었고 오히려 기백이 의젓하여 지사들은 더욱 감동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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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독수>

신문화혁명의 선구자인 진독수(陳獨秀)는 “나는 청년들이 톨스토이와 타고르가 되기보다 콜럼버스와 안중근이 되기를 원한다”며 안 의사를 중국청년의 표상으로 삼았다.

당시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로 대만과 팽호섬을 일본에 빼앗긴데 이어 러일전쟁 이후 요동반도까지 넘겨야 했다. 무능한 청조가 국가의 위기를 감당하지 못하자 혁명가들은 ‘청조타도’와 ‘공화정부 수립’을 외치며 안 의사를 혁명사상 고취의 소재로 활용했다. 혁명파 소설가 황세중(黃世仲)이 1909년말부터 1910년 5월까지 광주(廣州)에서 발행된 ‘남월보(南越報)’에 연재한 ‘조선혈(朝鮮血)’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일본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안중근 등 애국지사의 활약을 통해 중국인의 애국심을 각성시켰다(‘안중근 의거와 중국의 반제민족운동’, 손염홍).

하얼빈 거사 만 2년 후 중국에서는 무창봉기를 시작으로 신해혁명(1911년)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졌다. 중국의 지식인 나남산(羅南山)은 1914년 중국에서 발행된 박은식(朴殷植)의 ‘안중근전’ 서문에서 “우리 중국 지사들은 ‘그 작은 한국에 일대 호걸(안중근을 지칭)이 나타났는데 유독 우리나라에 그런 인물이 없을 수 있으랴’하면서 흥분을 금치 못했다.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창에서 봉기하여 우리 민족의 주권을 회복했으니, 안씨의 의거가 우리에게 정신적인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안중근의 의거가 중국 현대사의 대사건인 신해혁명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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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와 등영초 학창시절>

손문을 도와 신해혁명을 일으켰던 언론인 겸 혁명가 증용(曾鏞)도 이 책 서문에서 ‘오늘도 삼한의 지사들이 속속 중국으로 오고있다. 우리는 정의를 받들어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앞으로 삼한 옛땅에 또하나의 공화국을 건립하여 우리나라와 함께 동아에 일어서도록 해야 한다’라고 썼다. 안중근 의거가 중국인들의 한국관을 크게 바꾸고 양국민간에 공감대를 형성하여, 중국인들이 한국의 독립투쟁을 지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국공내전 시기에도 안중근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당파를 초월하여 ‘반일 애국주의’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많은 학생들이 안 의사를 연극 소재로 삼았는데, 나중에 총리가 된 주은래(周恩來)와 부인 등영초(鄧潁超)가 천진 남개(南開)대학 재학시절 등영초가 남장하여 안중근 역을 맡고 주은래가 연출을 맡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안중근은 한중 양국의 ‘영웅’이었다./조선일보 지해범 전문기자 hbjee@chosun.com

2 Comments

  1. 풀잎사랑

    2009년 10월 28일 at 4:50 오후

    아침에 종이신문에는 사진도 별로 안 좋게 나왔등만…ㅎ
    올리신 사진이랑 글들이 보기가 훨~ 좋습니다.

    양계초란 분이 너무 잘 생겨 보여요~
    이유인즉슨………
    울 안 중근의사님을 닮으라고 한 말도 있지만…ㅋㅋ~

    중국의 웬쑤를 우덜이 갚아줬는데..
    중국은 우리한테 시방 고맙단 말도 안하넹… 칫~!!!
       

  2. 지해범

    2009년 10월 28일 at 5:16 오후

    풀사님 지적이 날카롭네요.
    이 글 쓸 때 중국이 반성 좀 하라는 뜻도 담았어요.
    주은래 사진을 다른 것으로 올렸는데, 젊은 시절 주은래 잘 생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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