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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후손으로 중국에서 황후가 된 고조용과 용문석굴의 고사

[중국속의 한국사 기행(2)/조선일보 2010년 10월29일자 중국특집섹션]

고구려인의 후손으로중국에서황후가 된 고조용과 용문석굴의 고사

낙양=지해범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낙양과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한민족의 비사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 북위(北魏·386~534년)의 6대 황제 효문제(孝文帝)의 후궁이자 사후 황후로 추존된 고조용(高照容)에 얽힌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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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북쪽 망산에 있는 효문소황후의 묘. 맞은편 효문제의 능에서 찍었다./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조용은 효문제의 후궁으로 맏아들 원각(元恪)과 원회(元懷), 장락공주(長樂公主) 등 2남 1녀를 낳았다. 그녀는 효문제가 북쪽의 평성(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자, 496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낙양으로 향했는데, 오는 도중 갑자기 죽었다. 위서(魏書)는 나중에 황후가 된 풍소의(馮昭儀)가 그녀를 암살했다는 풍문을 기록했다. 맏아들 원각은 효문제에 이어 7대 황제 선무제(宣武帝)로 등극하자 어머니를 황후[孝文昭皇后]로 추존했다. 낙양 외곽 망산진에는 효문제의 능인 장릉(長陵)이 있고 이 능 뒤쪽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고조용의 무덤<사진>이 있다. 장릉의 입구 도로에는 ‘효문제의 능’이라는 표지판이 있으나, 고조용의 무덤에는 아무런 안내판이 없었다. 그러나 인근 과수원의 주민들은 “이 능이 효문제 황후의 무덤이라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그녀의 얘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낙양이 자랑하는 불교문화유적인 용문(龍門)석굴에도 효문소황후에 얽힌 얘기가 있다. 용문석굴은 대동(大同)의 운강석굴, 돈황의 막고굴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불린다. ‘위서(魏書)-석노지(釋老志)’에 따르면, 효성이 지극했던 선무제는 서기 500년에 아버지 효문제와 어머니 효문소황후를 위해 2개의 석굴을 조성하는데, 그것이 용문석굴 입구에서 4번째에 있는 ‘빈양동(賓陽洞)’이다. 총 24년에 걸쳐 연인원 80만명을 동원하여 조성한 이 석굴은 남동·중동·북동 등 3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중 중동이 아버지, 남동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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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 용문석굴의 빈양남동(왼쪽)과 중동./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빈양남동은 높이 9m, 너비 8m이며, 가운데 아미타불이 앉아있고, 그의 오른쪽에 가섭 등 2명의 제자, 왼쪽에 2명의 보살이 서 있다. 역사서에 기록된 바는 없지만, 전해내려 오는 얘기로는 선무제가 어머니의 얼굴을 본따 아미타불을 조성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에 대해 낙양박물관 용문석굴 분소 직원과 문화재 해설사 등에게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그들은 “어머니를 기려서 만든 것은 맞지만, 그의 형상을 본떴다는 것은 기록에 없는 얘기”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인의 피가 2분의1 섞인 선무제가 어머니를 기리며 만든 빈양남동의 아미타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인자한 한국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선무제는 나중에 자신의 황후로 역시 외가 친척인 고영(高英)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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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양남동의 아미타불. 선무제가 어머니 고조용(고구려인)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효문소황후의 남동생 고조(高肇)는 당시 최고 벼슬인 대장군 자리에 올랐는데,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 따르면, 그의 집은 낙양성 안쪽 경락사(景樂寺)의 동쪽에 있었다고 한다. 궁궐과 관청에 가까웠던 것은 그만큼 권세가 대단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선무제가 죽으면서 고조 가문도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고조는 양(梁)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했다가 선무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낙양으로 돌아왔다가 정적에게 살해되었다. 고조의 조카이자 선무제의 황후인 고영은 효명제가 즉위한 후 잠깐 황태후가 되었지만 곧 궁궐에서 쫓겨나 비구니가 되었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후 일족이 비참한 결말을 맞은 것이다.

망산에는 백제 유민 흑치상지(黑齒常之) 부자와 고구려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泉男生) 일족의 무덤도 있다. 흑치상지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망하자 처음에는 부흥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러나 후에 배신하여 당나라에 항복하여 당나라 장군이 되었다. 흑치상지는 고종(高宗)과 무측천 시기에 돌궐·토번과 여러 차례 싸워 이긴 명장이었다. 낙수(洛水) 남동쪽 종선방(從善坊)에는 그의 저택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측천의 개’였던 혹리 주흥(周興)의 모함을 받고 투옥되어 결국 감옥에서 자살했다.

천남생은 연개소문의 아들이다. 원래 성은 연(淵)이었으나, 후에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이름과 같다고 하여 천(泉)으로 바꾸었다. 연남생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동생인 남건 등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당나라에 항복하였고, 당나라의 향도가 되어 조국인 고구려의 멸망에 크게 기여하였다. 천남생은 매국의 댓가로 정 3품의 대장군(大將軍)이란 벼슬에 올랐고 그의 아들 천헌성(泉獻誠) 대에는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천헌성은 그의 재산에 눈독을 들인 혹리 내준신(來俊臣)의 모함으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서 목졸려 살해당했다. 하늘은 매국노 가문이 영원히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이 굶어죽는 북한에서 김정일의 맏아들 김정남이 동생 정은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중국 땅을 떠도는 것이 천남생을 연상시키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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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居易>

용문석굴 옆을 흐르는 이하(伊河)의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향산이다. 이곳에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무덤이 있다. 또 그 위쪽에는 향산사(香山寺)라는 절이 있다. 향산사는 516년 세워졌는데, 여황제 무측천은 풍경이 아름다운 향산과 향산사를 자주 찾아 신하들에게 시를 짓게 하고 가장 먼저 시를 쓴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 이곳에서 18년 동안 창작활동을 한 백거이는 이 절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절 이름을 따서 향산거사(香山居士)라는 호(號)를 지을 정도였다. 향산사는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이 처음 묻힌 곳이기도 하다.

낙양과 정주 사이에 있는 형양(滎陽)이란 곳은, 고구려 동천왕 시기 중국 위(魏)나라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킨 뒤 수천명의 고구려인을 끌고와 강제로 정착시킨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옛 고구려인들의 삶은 이곳을 지나가며 그저 머리 속으로 그려보는 수밖에 없다. /계속

1 Comment

  1. 김규용

    2011년 3월 28일 at 8:01 오후

    지 해범 님 ! !! 께선 고구려 역사에 대하서도 자세이 아실것이니 드라마 연개소문에서 어느정도가 사실인지를좀 알주시지요 방송국들의 역사 왜곡이 너무도 심하여 물론 시청률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에 어느정도 양념은 이해 를하지만 완전아헤 왜곡하엿다느기사를보아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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