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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낙양에서 스러진 백제 의자왕의 한

[중국속의 한국사 기행(1)]/조선일보 2010년 10월29일자 중국특집섹션]

"중국낙양의 의자왕 묘에서 석관 나왔었다" 현지 주민 증언

묘터는 이미 훼손돼 보리밭으로 변해

낙양=지해범 조선일보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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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용문역 플랫폼에서줄을 서 기다리는중국 승객들. 앞에 보이는 고속열차가 시속 350킬로로 달리는 화해호다.>

지난 19일 오후 4시 20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을 출발한 고속열차 화해호(和諧號)는 1시간 40분만에 370㎞ 떨어진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서안과 정주(鄭州)간 505㎞를 2시간만에 주파하는 이 열차의 순간 최고속도는 350㎞. 깨끗한 기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거나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쓰레기를 좌석 아래로 쓸어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은 중서부 내륙까지 더이상 ‘옛날의 중국’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직항편이 없는 낙양까지 가려면 서안이나 정주를 거쳐야 하지만, 거대한 대륙을 반나절권으로 연결하는 고속철도 덕분에 큰 불편함은 없다.[불법복제-전재금지]

하남성은 황하(黃河)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하 유역은 옛부터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상해 천진 등 연해지역에 경제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인구 1억 명의 시장을 바탕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낙양은 황하의 중심, 즉 중원에 위치하여 9개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한 왕조는 동주(東周), 후한(後漢), 조위(曹魏·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 서진(西晉), 무주(武周·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무측천이 세운 왕조),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이다. 낙양이란 이름은 낙수(洛水·지금의 洛河)에서 유래했는데, 이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낙양’의 발음은 ‘떨어지는 태양’을 뜻하는 ‘낙양(落陽)과 같다고 해서, 은근히 미신을 쫓는 모택동(毛澤東)은 한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태양‘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불법복제-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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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낙양-정주 지도>

관중(장안과 그 주변지역)에 도읍을 정했던 왕조들은 낙양을 부도(副都), 즉 제2의 수도로 여겼다. 수도가 서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유로 수당시대의 낙양에는 동쪽의 화북평원과 강남 지역 등지에서 거둔 곡물을 저장하는 함가창(含嘉倉)이라는 대형 창고가 있었고, 낙양 동쪽의 운하 주변에도 여러 개의 곡물창고가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전기의 황제들은 관중 지역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저장한 식량을 풀어 굶주림을 해결했다. 우리말에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뜻하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표현이 곧 중국 낙양에서 유래한 말이다.[불법복제-전재금지]

낙양과 인연이 깊은 한국사의 인물은 백제의 마지막 국왕인 의자왕(義慈王)이다. 한때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은 재위 16년째부터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을 박해하고 국정을 게을리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당으로 끌려간 비운의 국왕이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그는 태자 효, 왕자 융, 그리고 백성 1만2000여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뒤 곧 병사했다고 한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다는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으로 기록돼 있다. 손호는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吳)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陳)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은 공통점이 있다. 당(唐)이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백제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법복제-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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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으로 변한 의자왕의 묘터/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망산, 즉 북망산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의 노랫가사가 가리키는 곳이다. 죽는다는 의미의 ‘북망산천 간다’고 할 때의 그 북망산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망산진(邙山鎭)으로 되어있다. 낙양 시 중심에서 4㎞쯤 떨어져 있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가보면 얕은 구릉에 채소밭이나 과수원이 대부분이며, 능(陵) 주변에 주택도 있다. 이곳은 한(漢)대 이후 여러 왕조의 무수한 제후와 귀족들이 묻혀, ‘사는 곳은 소주·항주요(生在蘇杭), 묻히는 곳은 망산(葬在邙山)’이란 말도 생겨났다.[불법복제-전재금지]

그러나 정작 의자왕이 묻힌 곳은 이곳이 아니다. 중국측 조사에 의해 진숙보 등이 묻힌 곳은 망산에서 동북쪽으로 15㎞ 쯤 떨어진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莊鎭) 봉황대촌(鳳凰臺村)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중국의 조사팀은 봉황대촌에서 여러 차례 조사작업을 벌였다. 특히 중국 정부는 항공촬영을 통해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찾아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만 발견했을 뿐, 의자왕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낙양과 자매결연을 맺은 부여시는 지난 2000년 4월 의자왕 무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현지에서 정갈한 토양을 채취하여 한국으로 가져온 뒤 이를 능산리 고분군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묘지를 조성할 때 넣고 제사를 올렸다. 수천년간 이국땅을 떠돌던 백제의 마지막 국왕 부자의 원혼을 이렇게 달랜 것이다.[불법복제-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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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보의 묘로 추정되는 분묘. 도굴된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됐다./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지난 20일 오전 시골길을 물어 물어 맹진현 봉황대촌에 도착했을 때, 현지 노인들은 마을 뒤쪽의 넓은 밭을 가리키며 “이 부근이 한국의 국왕이 묻혔던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평평한 토지로 파란 보리싹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몇년 전에 닦았다는 1차선 시멘트 도로가 나 있었다. 한 노인은 “50년대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린 날, 멀쩡하던 밭이 원 모양으로 4~5m 땅 밑으로 내려앉았는데, 꺼진 땅의 지름은 10m 정도였다. 그때 전문가들이 와서 발굴을 했는데, 높이 1m 정도의 석관이 나왔다고 들었다. 조사결과 한국의 한 국왕의 묘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뒤로 묘지는 덮였고 밭으로 변했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중국의 협조를 받아 석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 발굴작업을 벌인다면, 의자왕 묘의 실체도 드러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짐작컨대, 50년대는 중국 정부가 외국 국왕의 묘를 유지 보수할 돈이 없어 그냥 덮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하남성 낙양시 정부와 접촉하여 비용을 우리가 댄다면, 의자왕의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역사학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불법복제-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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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대촌 당지부사무실/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노인들은 이곳으로부터 1㎞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분묘도 소개했다. ‘진숙보’의 묘로 알려진 이 분묘<사진>는 높이가 15m, 지름이 30m 정도여서, 의자왕 묘의 형태와 크기를 짐작케 했다. 그러나 표지석이나 안내판 하나 없어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묘 꼭대기에 올라가자 봉분은 이미 평평하게 다듬어져 고구마밭으로 변해 있었고, 밭 한가운데는 묘 아래쪽으로 뚫은 2개의 구멍이 5~10m 깊이로 나있어 여러 차례 도굴된 것이 틀림없었다. 묘지 옆은 밭으로 개간하느라 봉분을 많이 훼손했고, 사람이 거주한 것 같은 작은 동굴도 2개나 있었다. [불법복제-전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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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숙보 묘의 도굴흔적.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이 2개나 뚫려있다. /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소중한 유적을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묻자, 마을 주민은 “이런 묘지가 워낙 많아 일일이 관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봉황대촌이 생긴 것이 청(淸)대라고 하니, 그 이전에는 인가도 없는 허허발판이었을 것이다. 의자왕의 묘도 13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이런 식으로 방치되고 훼손되다가 끝내 멸실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중국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나약함을 탓해야할 것 같다./계속 [불법복제-전재금지]

18 Comments

  1. 풀잎사랑

    2010년 11월 1일 at 1:00 오후

    내용이 다시보아도 마음이 찡합니다.
    비록 방종한 왕이였지만 멀리까지 끌려가 병들어 죽었다니..
    지금이라도 계속 발굴작업을 해서 확인이 되면 우리나라로 당연히 모시고 와야죠.
    요즘 백제대전을 하면서 괜시리 의자왕은 어찌 되었을까.. 생각이 나더라구요.

    수고 하셨어요, 지기자님~~
       

  2. 구름에 달가듯이

    2010년 11월 1일 at 4:58 오후

    역사란 승자의 기록일뿐 백제 의자왕과 삼천궁녀가 과연 진실일까는 의문입니다 철저히 파괴되고 기록조차 남아있지않은 백제의 역사와 당의 포로로 잡혀간 타국땅에서 묻히는 자리마저 격하당하는 수모를 겪은 의자왕의 묘터가 이제는 보리밭으로 변해버렸다니 마음이 아프네요 하루빨리 잃어버린 백제사를 바로 세워 그들의 명예를 복원시켜줘야할텐데…   

  3. 寒菊忍

    2010년 11월 1일 at 5:25 오후

    옛날 지기자님 내외께서 낙양 용문석굴
    앞에서 시진 찍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화해호를 타고 4시간을 달려
    정주를 거쳐 낙양 용문석굴에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95% 이상 석굴 부처님이 다 훼손되었고
    멀쩡한 부처님은 몇 안 남은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멍청한 지도자 모씨 때문에 다 훼손된건지
    아니면 멍청한 백성들이 깨다가 국을 끌여먹은 건지…

    너무 심각하게 훼손된 모습을 보고
    아쉬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서역의 석굴들은 이슬람이 망가뜨렸고
    내부의 석굴들은 중국인들이 망가뜨렸을텐데…   

  4. 와암(臥岩)

    2010년 11월 1일 at 7:52 오후

    ‘기자정신’이 빛난 기사라고 여겨졌습니다.

    충남 부여시가 끝내 포기한 백제 의자왕 무덤을 끝까지 추적했군요.
    부여시와 문화재 당국의 협조를 받아 이 왕릉을 꼭 찾아주시길 빕니다.

    발로 찾아낸 좋은 기사,
    추천 올립니다.
       

  5. 풍금소리

    2010년 11월 2일 at 1:11 오전

    마음에 쿵하고 내려앉는 기사 보고 갑니다,,,   

  6. 지기자

    2010년 11월 2일 at 4:56 오후

    풀사님,구름에달가듯이님,한국인님,와암님, 격려와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역사를 경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토에 조그마한 자극제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7. 한규식

    2010년 11월 2일 at 6:50 오후

    잘보았습니다.
    언젠가 잘되겠지요.
    세계대백재전도 열고 있으니..   

  8. 김규용

    2011년 3월 28일 at 7:54 오후

    백제의 의자왕은 항복하여 목숨을 구걸한 왕이다 한마디로 쓰레기 같은 임금이엿지요 수많은 충신들을 제손으로 척살하고 유배보내고 이 덜떨어진 의자왕때문에 고구려 까지도 멸망의길로 들어서게 치욕스런놈입니다 !!   

  9. 김규용

    2011년 3월 28일 at 7:57 오후

    지기자 님 !! 의 높은 관심은 대단이 중요한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를경시하고 그러는것이 모두 사회주의적 색채를지닌 분들의 조작이지요 !! 특히 고구려의 유적에대한 소식을 가다립니다 !!   

  10. 신경섭

    2011년 4월 13일 at 3:41 오후

    1996년 백제문화 취재를 위해 뤄양(낙양)에 갔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지기자님이 지적한 장소인 봉황대 근처의 고구마 밭과 옥수수 밭으로 변한 의자왕 추정 묘 주변 설명도 거의 일치하고…. 그 당시 저희는 공주교육대 유원재 교수, 그리고 낙양 관림에 있는 고대박물관장 등이 함께 동행했었는데, 유일하게 자신이 치세하던 나라 밖에 묻힐 수 밖에 없었던 의자왕이 한을 잘 느낄 수 있었지요.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낙양에 도착한 뒤 병사해 유민들로 하여금 흰 옷을 입고 곡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아마도 1만2천 명이 넘는 유민들의 동요을 우려해 죽인 것은 아닐까? 생각되 되네요.
       

  11. 신경섭

    2011년 4월 13일 at 3:48 오후

    삼국사기와 구당서에 전하는 의자왕 관련부분은 ‘손호와 진숙보의 묘 근처에 묻었다’라고 돼있고, 손호는 삼국지 끝부분에 나오지요, 오나라를 정벌한 장군이 종회 던가? 촉나라는 등애 이고… 삼국지에 보면 손호는 포악하기가 이를데 없어 ‘산 사람의 눈을 뽑았다’는 대목도 나오는데, 옛날 대부분의 왕조 마지막 왕에 대한 기록은 이와같은 멸망의 책임을 돌리는 그러한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 그랬으니까 망했지!!!’ 라는 생각이 들도록 말이죠….. 요즘은 백제의 멸망원인으로 당시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 관계에서 남북을 축으로 하는 세력(고구려-백제-왜)과 동서 축(당-신라)의 세력다툼에서 남북축이 패한 것으로 규정하는 학설도 지배적이고요, 단순히 한 임금이 방탕했다고 해서 나라가 기운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서를 쓴 사람들의 단순한 논리에 넘어가는 것이겠지요. 주나라의 마지막 왕(걸왕인가 탕왕인가?) 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거기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주지육림’ 이라는 정도는 잘 아시겠지요? 역사를 함부로 단정하고 매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    

  12. 신경섭

    2011년 4월 13일 at 3:58 오후

    낙양은 위에 쓴대로 96년도에 가보고 재작년 운대산과 숭산 등반을 위해 다시 가봤었는데, 룽먼스쿠(龍門石窟) 중간부분에 있는 신라 유학승들이 용문석굴에 조성한 ‘신라감실(新羅龕室)’을 찾아보고자 했으나, 진입할 수 있는 길은 폐쇄해놨고, 다행이 낙양의 가장 유명한 먹을거리인 수석은 일부 코스를 맛을 볼 수 있었지요. 그리고, 낙양의 유명한 술인 두강주(杜康(剛?)酒)도 함께 맛볼 수 있었고요. 참 볼 것 먹어볼 것 많은 유서깊은 도시이지요…………
       

  13. 지기자

    2011년 4월 14일 at 4:05 오후

    신경섭님, 반갑습니다.
    1996년 낙양에 가셨을 때 한국의 왕이 묻혔다는 ‘석관’ 발굴 얘기도 들어셨나요?
       

  14. 김규용

    2011년 4월 24일 at 5:27 오후

    지기자님 !! 이왕하시는것 이완용의 후손들이 호주에 살고있다고 들엇읍니다 이런것이나 확인해주시지요 그리고 국내에 살고 있는 친일 5 적의 후송들이 어디고 있느지도 !!   

  15. 신경섭

    2011년 5월 4일 at 6:05 오후

    1996년 낙양에 갔을 때 당시 고대박물관장 얘기는 1950년대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홍위병들에 의해 과거 봉건주의 유산이라고 해 모든 무덤들을 파헤치고, 경작지로 만들었으며, 무덤의 흔적들은 보리나 밀이 자랐을때 항공기에서 보면 옛날 무덤은 ‘판축’으로 조성해서 식물들이 덜 자라는 흔적으로 알 수 있다도 합니다. 그 당시 묘비나 석관 등이 발굴됐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구요, 아무튼 외국의 왕이 묻힌 자리가 봉황대 근처라는 말은 지역 주민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우리가 잘 아는 ‘북망산’ 지역이라는 것도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낙양에서 볼 때는 산처럼 보였는데, 실제 가보면 평평한 지역이지요. 멀리서 볼 때는 산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없어지는 산이라 해서 북쪽에 있는 망산(邙山 또는 茫山)이라서 ‘북망산’이라 하고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으로 가는 이유는 낙양의 경우 한나라대부터 9개 왕조가 수도로 정해서 왕족이나 공경대부들이 죽으면 황토로 돼있는 망산의 일정구역에 매장을 해서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 간다’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낙양의 볼거리는 또 모란이 유명해서 4월에는 모란 축제가 열리고, 그림도 낙양 모란 그림이 유명합니다. 그래서 ‘洛陽木丹天下甲’이라는 말도 있죠.    

  16. 신경섭

    2011년 5월 4일 at 6:09 오후

    1996년 당시 낙양시 관계자 얘기는 부여군에서 3억원 정도만 지원하면 그 지역 일대를 발굴할 수 있을 거라 했는데, 당최 중국사람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서 그때 부여군에 전하지도 못했고, 또 몇 년 후에 부여군과 낙양시가 자매결연으로 교환공무원도 교류를 하곤 했는데, 그 이후 소식은 잘 듣지를 못했습니다. 의자왕의 한을 풀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써는 요원한 것 같습니다.   

  17. 김규용

    2011년 7월 9일 at 4:40 오전

    백제 의자왕에 대한 기록은 이제 잊자 !! 그는 이라크의 사담후세인 같은 비열한인간입니다 나라의 고귀함을 망각한 !! 그놈의 멍첨한 행각으로 고구려 까지 멸망의 길로 인도한 쓰레기 일뿐이여 !!   

  18. 지리산

    2012년 8월 10일 at 3:52 오후

    삼국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시킨 왜곡 조작된 왜넘들과 지나족들의 농간에 깨춤치는 일이다. 일제시대 조선사편수위원회 등의 조선족의 상고사를 아예 없애버리거나(단군조선을 신화로 폄하함 등)왜곡해놓은 역사를 그대로 배우고 있다. 신채호 선생님이 재조명한 한단고기나 삼성기에는 분명히 환조선과 단군조선이 있고 그 이전의 역사가 있다. 중국대륙을 지배했던 우리민족이고 삼국도 중국대륙을 지배한 사실이 있다. 이러한 위대한 조선족에게 지배받던 지나족이 진시왕의 분서갱유로 각종사서와 기록을 없앴으며 사기를 쓴 사마천이 조선족의 역사기록을 없애고 지나족의 역사로 만든 것이다. 의자왕이 중국대륙에서 신라,고구려,백제, 수, 당나라와 세력 다툼을 벌린 것이다. 위대한 역사를 바로 세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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