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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익 논설위원

북한연평도 포격 사태 와중에 있었던 다이빙궈 중국 국무위원의 방한(訪韓) 행보를 보고 새삼 역사책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중국 관리의 이같이 무례한 방한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느낌 때문이다.

중국은 다이빙궈의 한국 방문을 그의 출발 몇 시간 전 한국에 통보하며 "오늘 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다이빙궈는 한국에 와 우리 외교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방한 목적을 얘기하지 않고 "대통령을 만나 얘기하겠다"고 했다. 그리곤 다음날 이 대통령 면담에서 말미에 느닷없이 ‘6자 회담 재개’ 제안을 내놨다. 이 대통령은 ‘6자회담 재개’에 대해 "지금은 때가 아니다"고 분명히 밝혔지만 중국은 다이빙궈가 귀국하자 ‘중대 발표’라며 관련국들에 6자회담 재개를 제안했다. 외교 관례는 무시됐고 한국 정부 의견을 듣겠다는 자세도 없었다.

다이빙궈의 오만한 행동은 불과 100여년 전까지 우리 민족사가 중국과의 관계에서 겪었던 악몽 같은 일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1895년 청일전쟁으로 한국이 독립국이 되기 전만 해도 이 땅에 왔던 중국의 사신(使臣)들은 상전이자 두려움 그 자체였다.

1641년 서울에 온 청나라 사신들은 숙소인 태평관에 조선의 영의정 이하 대신들을 집합시킨 후 반청(反淸)인사들을 끌고 와 사형시켰다. 태종 때 명나라 사신은 숙소가 작고 허술하다며 들르는 곳마다 새로운 영접청(迎接廳)을 지으라고 패악을 떨었다. 원나라 사신과 주재관은 아예 고려의 국정을 도맡았다. 원나라 주재관과 병사들 먹여 살리느라 백성이 나무껍질로 연명할 지경이 되자 고려는 "이제 더 나올 게 없습니다. 꾸물거리는 벌레 같은 백성들을 가련히 여기시어 은덕을 베푸소서"라고 원 황제에게 요청했다.

구한말 원세개는 1884년 27세 나이에 와 10년 동안 이 나라의 정치·경제·외교를 주물렀다. 주한 외교사절 중 원세개만이 앉아서 국왕을 알현했다. 국왕은 원세개 허락 없이는 외교관도 임명하지 못했고 차관도 얻을 수 없었다.

물론 다이빙궈가 그 시대의 중국 사신과 같을 수 없다. 지금 한국이 그렇게 약한 나라도 아니다. 그러나 다이빙궈 해프닝은 대한민국이 아무리 성장했어도 중국은 한국에 대한 우월의식, 한국을 속국으로 보는 버릇을 DNA처럼 갖고 있다는 것을 새삼 일깨웠다. 동북공정은 빙산의 한 귀퉁이일 뿐이다. 중국의 미래 엘리트를 키우는 대학 역사책들은 "한국의 역대 왕조는 중국의 속방(屬邦)이었다"고 가르친다. 중국에 식량과 연료의 절반 이상을 의지하고 3대 세습 독재를 인정받는 대가로 중국에 대해 개처럼 꼬리 치는 북한의 행태가 중국의 이런 태도에 부채질을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내치(內治)가 이뤄지면 주변 복속에 나서는 게 중국사의 법칙이다. 중원에 신흥세력이 들어서고, 그들이 의욕을 보이면 보일수록 한반도에 희생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개혁개방 후 세계의 수퍼파워로 떠오른 지금의 중국이 그런 상황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국익도 좋고 실용도 좋지만 국가의 자존을 유지하는 데는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국민의 힘과 지혜를 한데 모으고 그걸 바탕으로 우리의 결기를 보여야 할 땐 단호히 보여야 한다. 맹자는 "사람은 스스로 모욕받을 짓을 한 다음에 남에게 모욕당한다(夫人必自侮然後人侮之)"고 했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인포그래픽스 [InfoGraphics] 중국의 거침없는 경제성장, 세계 1위 넘보나?
[천자토론]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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