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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만이 경쟁하는 까닭

한국이 중국의 ‘신해혁명 100주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上)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장 지해범

손문일본시절.jpg

<손문이 일본에 머물던 시절(사진 가운데)>

2011년 올해는 중국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한해이다. 청(淸)조를 멸망시킨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한일강제합병 100년이었던 지난해(2010년)를 역사회고와 자성(自省)의 계기로 삼았듯이, 중국과 대만도 올해 신해혁명 100년을 평가하고 기념하기 위한 다양한 학술회의와 기념식을 준비 중이다.

중국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1년 앞둔 지난해부터 이미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준비해 왔다. 작년 10월 하순 소집된 중국 제17기 정협(政協) 11차 회의는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활동 거행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키고, 준비위원회도 발족시켰다. 이에 앞서 작년 9월15일 중국 호북성(湖北省) 무한(武漢)의 홍산(洪山) 호텔에서는 ‘신해혁명100년 논단’이란 대규모 회의가 열렸다. 무한시 정치협상회의가 주최한 이 학술회의에는 손문의 증질손(曾侄孫)인 손필달(孫必達)을 비롯한 신해혁명 주역의 후손들과 려무외(厲無畏) 정협부주석 등 각계 지도자 및 학자들이 대거 참석했다.

중국이 신해혁명 100년 기념활동에 적극적인 데는 몇가지 배경이 작용하고 있다. 첫째는 대만과의 정통성 경쟁이다. 둘째는 중국내 도시간의 경쟁이다. 신해혁명을 둘러싼 중국과 대만간의 경쟁은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서 비롯된다. 신해혁명이란 1911년말부터 1912년초까지 약 5개월 사이 혁명에 가담한 신식군대를 중심으로 한 무장봉기를 통해 청(淸) 왕조를 무너뜨린 사건을 말한다. 그 최초의 발발지역은 지금의 무한인 무창(武昌)이었다. 그래서 그 첫 봉기를 ‘무창수의(首義)’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19세기말~20세기초 부패하고 무능하며 제국주의 열강에 굴종하는 청 왕조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식계층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손문(孫文興中會 창설), 황흥(黃興華興會 창설), 채원배(蔡元培光復會 창설) 등이다. 이들은 1905년 7월 일본 동경에서 세력을 연합하여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만주조정 축출(驅除韃虜), 중화의 회복(恢復中華), 민국의 건립(創立民國), 경제적 평등(平均地權)’의 16자 강령을 발표했다. 만주족(滿洲族) 정부인 청조를 무너뜨리고 한족 중심의 공화제 정부를 세우겠다는 목표를 내건 것이다.

그해 11월 손문은 동맹회의 기관지인 ‘민보(民報)’에 ‘민족,민권,민생’을 핵심으로 하는 이른바 ‘삼민주의’를 발표했다. 이들은 청조를 유지하면서 개혁을 도모하자는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 등 변법자강파들과 논쟁을 벌였으며, 지식인과 젊은층에서 영향력을 넓혀갔다.

《民呼日报》1909年发表的反映帝国主义掠夺中国铁路权益的漫画.jpg

<1909년 民呼日報에 실린 만화.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의 철로를약탈해가는 것을 풍자했다./중국 인터넷>

내각제 도입 등 부분적 정치개혁으로 반청(反淸)운동을 잠재우려던 청 정부는 1911년 5월부터 시작된 ‘보로(保路)운동’으로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청 정부가 재정난 타개를 위해 전국의 민영철도를 제국주의 국가들에 팔아넘기려 하자, 중앙에서 먼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동(廣東) 사천(四川) 등지의 사대부(紳士)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해 10월10일 청 정부가 호북의 신식군대(湖北新軍)을 동원해 폭동을 진압하려 하자, 신군 내부에 조직된 혁명단체인 문학사(文學社), 공진회(共進會) 등이 무창에서 봉기했다.

이들 혁명군의 규모는 호북신군의 약 3분의1에 달했다. 10일 밤새 벌어진 전투를 통해 청군의 본거지가 혁명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러한 반청독립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11월말까지 14개 성(省)이 혁명군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그해 말 해외에서 귀국한 손문은 1912년 1월1일 ‘임시대총통선언서’와 ‘전국동포에게 고하는 글(告全國同胞書)’을 발표, 중화민국의 탄생을 선포하고 자신은 임시 대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내부의 분열과 군비부족 등 재정난 속에 손문은 북양(北洋)군벌인 원세개(袁世凱)와 타협하고 만다. 원세개가 청 황제를 퇴위시키는 조건으로 대총통의 지위를 그에게 넘기는 협상이 성립, 1912년 2월12일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는 퇴위하고, 원세개는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한다. 이로써 260여년 이어져온 청은 무너졌으나, 혁명의 과실은 군벌 출신인 원세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무한대학 역사과 교수 겸 중국전통문화연구센터 주임인 풍천유(馮天瑜) 교수는 “신해혁명은 중국에서 2천년 된 전제군주제를 종식시켰다는 점에서 ‘파(破)’의 의미를, 또 새로운 민주공화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입(立)’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국은 신해혁명이 자산계급, 즉 ‘부르조아의 민주혁명’이란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다. 중국 인민의 반제·반봉건 투쟁이 신해혁명을 기점으로 더욱 깊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으나, 사회주의 혁명으로 가는 중간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袁世凱.jpg

<袁世凱>

이와 더불어 중국의 일부 학자들은 신해혁명이 내건 ‘16자 강령’ 중 ‘만주조정 축출(驅除韃虜)’과 ‘중화의 회복(恢復中華)’이란 강령이 중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화중사범대학 전 총장이자 신해혁명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장개원(章開沅) 박사는 “만주정부를 축출하자는 구호가 민중들의 관심을 끌고 혁명을 성공으로 이끄는데 힘이 되었지만, 이는 ‘한족(漢族)중심주의’ ‘대(大)한족주의’를 조장하였고, 그에 따라 20세기 초 ‘황제(黃帝)문화’를 지나치게 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통일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중국이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미와 한계를 모두 지적하며 거리를 두는 것과 달리, 대만은 자신들이야말로 신해혁명의 계승자라며 긍정적 의미를 적극 부각시킨다. 대만의 신해혁명 기념활동 단체들은 “신해혁명의 최대 의의는 국부 손중산 선생이 중화민국을 세웠다는 것”이라며 “신해혁명 100년은 곧 중화민국 100년”이라고 강조한다. 혁명의 정통성이 대만에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작년말 중국정부가 100주년 기념식을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이 공동으로 개최할 것을 제안했을 때 대만측은 “각자의 기념활동을 할 뿐”이라며 거절했다. 대만 마영구(馬英九) 총통은 지난해말 ‘중화민국 건국 100주년 경축활동 준비위’를 발족시키고, 소만장(蕭万長) 부총통을 주임위원으로, 행정원장과 입법원장을 부주임위원으로 임명했다.

중국이 대만을 의식하여 작년부터 일치감치 기념활동 준비에 들어간 이유는 또 있다. 2011년이 신해혁명 100주년인 동시에 공산당 창당(1911년 7월23일) 90주년이기 때문이다. 신해혁명을 공산당 창당과 결부시킴으로써, 혁명의 정통성이 중국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이글은 ‘한국논단’ 3월호에 실린 글의 일부임]/계속

7 Comments

  1. 별가람

    2011년 2월 24일 at 7:18 오후

    지해범 기자님, 한자어 이름을 한국어 발음으로 올바르게 적으니 읽기가 참 편하고 좋습니다. 이렇게 편하고 좋은 걸 왜 한국어를 버리고 그 골치아픈 중국어를 쓰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갑니다.

    같은 한자를 그 대상의 국적을 따져서 다르게 읽는다는 건 동서고금을 통들어서 이 미친 대한민국만 하고 있는 코미디입니다. 한국인은 집단으로 미쳤습니다. 정부부터가 앞장서서 미쳤습니다.    

  2. 풀잎사랑

    2011년 2월 24일 at 9:39 오후

    글을 읽으니 마지막황제의 마지막 장면들이 떠오르네요.

    날씨도 너무 좋은데..
    비 온 후엔 또 추어진다고합니다.
    일교차 심할 땐 고저 감기 조심.@!
       

  3. 문복록

    2011년 2월 25일 at 3:15 오전

    중국이 무얼 걱정할까..돈이요 땅이요 사람이요..무엇 하나 부러울것 없는 지금..걱정은 태산이다..3-40 개민족 국가라 소련처럼 될것이고 만주땅 만주족이 티베땅 티벳족이 고구려땅 한국족이..그러고 나면 없구나..울만하다..걱정태산이다..어쩌면 좋노…걱정마라 한국이 도운다..   

  4. 그냥

    2011년 2월 28일 at 2:53 오전

    오늘의 세계는 너 나 할것 없이 모두 서양이 발명한 제도와 기술과 문물로서 살게 되었지만,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저마다의 특성과 진통을 격었습니다.

    세상 일은 지나놓고 보면 참 쉬운 것인데 그 당시 무엇 때문에 그런 혼란과 진통을 격어야했을까? 를 되짚어 보면 그곳에는 언제나 합리성 보다 [기득권의 집단이기주의] 같은 고약한 것이 뙤아리를 틀고 있음을 봅니다. 서양의 합리성에 일찍 눈을 뜬 나라가 일본 입니다. 일본은 문을 활짝 열고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한 때 아세아의 맹주 노릇도 했고 지금도 [아세아에서 가장 앞선 나라]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5. 지기자

    2011년 2월 28일 at 11:38 오전

    별가람님,반갑습니다.
    중국어 표기는 한국발음으로 하는 것이 가장 논란이 적지만, 문제는 정부기관인 국립국어원이 정한 ‘외국어 표기법’이 현지발음 원칙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칼럼 등으로 여러번 지적을 해도 공무원들은 귀를 막고 있지요.   

  6. 지기자

    2011년 2월 28일 at 11:42 오전

    풀사님도 ‘마지막 황제’ 영화 보셨군요.
    황제도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지요.
       

  7. 지기자

    2011년 2월 28일 at 11:45 오전

    그냥님,지적에 공감합니다.
    지금도 기득권의 집단이기주의가 한국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지요.
    거기에 ‘지역 이기주의’도 한몫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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