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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음악가와 사랑에 빠진 중국 공산당 여전사의 동굴결혼

한국출신 중국 3대 작곡가 정율성 선생의 부인 딩쉐송 여사

2011년5월29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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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 여전사였던 딩쉐송(왼쪽)과 한국 출신의 음악가 정율성의 중년 시절 모습>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 출신의 음악가 정율성(鄭律成·1918~1976) 선생의 부인으로 중국의 첫 여성대사를 지낸 딩쉐송(丁雪松.1919~2011) 여사가5월 29일 북경에서 별세했다고 그의 딸 정소제(鄭小提·68)씨가 2일 밝혔다. 향년 92세.

딩 여사는 1919년 중국 사천성 파현(巴縣)에서 태어나 18세에 공산당에 가입, 연안(延安)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여전사로, 공산중국 출범 후에는 국무원 외사판공실 비서장, 대외우호협회 부회장을 거쳐 중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네덜란드와 덴마크 주재 대사를 지냈다. 주은래 초대 총리의 양녀이기도 하다. 그녀가 한국 출신의 남편 정율성을 만난 것은 1938년 공산당 지도부가 연안에 머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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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시절의 정율성>

전남 광주 출신인 정율성은 일제의 압박을 피해 1933년 형들과 함께 중국 남경(南京)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조선 의열단에 가입해 항일투쟁을 벌이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성악 등을 배웠다. 1937년 상해를 거쳐 연안으로 간 정율성은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해 음악적 재능을 갈고 닦았다. 2년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뒤 그는 ‘팔로군행진곡’을 작곡 발표했다. ‘앞으로(向前),앞으로,앞으로,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힘찬 곡조와 가사로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연안에서 공산당 내 문예오락 일을 맡은 정율성은 19세의 나이로 연안에 온 딩쉐송을 만나 음악과 예술에 대해 얘기를 나누며 금세 가까워졌다. 이 일로 정율성은 당내 비판을 받았으나, 한국 출신으로 공산당 대장정에 참가한 포병대장 무정(武亭)의 변호로 모함을 벗었다. 딩쉐송 역시 주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음악가를 평생의 반려로 삼기로 결심, 1941년 두 사람은 팔로군이 주둔하던 동굴에서 동료들의 뜨거운 축하 속에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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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머물던 시절의 딩쉐송과 정율성/사진=정율성 선생의딸 鄭小提씨(북경) 제공>

두 사람 사이에서 곧 딸이 태어났으나 먹일게 없자 정율성은 가장 아끼던 바이올린(중국어 小提琴)을 팔았다. 딸 이름을 ‘소제(小提)’로 지은 것은 이 일을 잊지않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딸 소제씨도 아버지를 이어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정율성이 작곡한 ‘팔로군행진곡’은 공산정권 수립 후 ‘인민해방군가’로 불렸으며, 1988년에는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중앙군사위 주석에 의해 정식 군가로 지정됐다. 정율성은 이곡 외에도 ‘연안의 노래(延安頌歌)’ 등 360여곡을 남겼다. 40년대말~50년대초 북한에 거주하게 된 그는 ‘조선인민군 행진곡’ 등 많은 노래를 작곡했으나, 북한에서의 입지가 어려워지자부인 딩쉐송의 양부인 주은래의 도움을 받아 ‘중국 국적’을 얻고 50년대초 중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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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북경 천안문의 국가 행사에 참석한 정율성과 딩쉐송>

정율성은 58세 때인 1976년 12월7일 친구와 사냥을 하던 도중 뇌혈관 파열로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당시 정율성은 고혈압이 심해얼굴이 붉게 충혈될 정도였다. 하지만 외교업무에 바빴던부인 딩쉐송 여사는 그것을알지 못했다.딩 여사는 훗날 "붉은 얼굴이 고혈압을 알리는 경고였는데도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추운 날씨에 사냥 나가는 남편을말리지 못했다"며눈물지었다고 한다.

중국은 정율성을’3대 혁명음악가’ 겸 ‘건국 100대 영웅’으로 선정해 지금도 추앙하고 있다. 2002년 그의 삶과 사랑을 그린 영화 ‘태양을 향하여(走向太陽)’가 중국에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영화 제목은 그의 노래 ‘인민해방군가’의 첫문장에서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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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딩쉐송 여사. 남편과 함께 행복했던 시절매고 다녔던하얀 머플러를 평생 좋아한 것 같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정율성의 예술은 양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 정율성의 고향인 광주시가 2005년부터 ‘정율성 국제음악제’를 한국과 중국에서 번갈아 개최하고 있다. 올 8월(상해)과 10월(광주)에도 열릴 에정이다. 2008년에는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더 히스토리’가 한국에서 제작 발표됐다. 딩 여사는 남편의 사망 후 홀로 딸을 키우며 외교관 등 공직생활을 해왔다. 딩쉐송 여사의 장례식은 3일 중국 외교부 ‘노(老)간부국’의 지원으로 치러지며, 정율성 선생이 묻혀있는 북경 팔보산 혁명공원묘지에 안장될 예정이다. 강운태 광주시장이 2일 북경으로 조화를 보냈다./지해범 중국전문기자 hbjee@chosun.com

[사족/당시의 사랑은 비록 흑백사진 속에 남아있지만, 지금보다 훨씬 순수하고 열정적이지 않았을까? 내일이면 적군의 총에 죽을지 모르는 젊은 전사들의 사랑. 결혼식이 동굴이면 어떻고, 신혼방이 야전텐트 속이면 어떠랴.]

7 Comments

  1. 참나무.

    2011년 6월 3일 at 12:42 오후

    …딸에게 먹일 게 없어 소제금을 팔고…잊지않으려고 딸 이름도 소제…
    중국에선 바이올린을 소제금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고…

    찌잉하네요 지기자 님 오늘 소식은

    (이번 6월 청담시낭독회엔 김기택 시인을 모신답니다
    뵈올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만…^^)   

  2. 지기자

    2011년 6월 3일 at 2:39 오후

    참나무님,반갑습니다.
    음악가 정율성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남편을 잃고 30여년간 꿋꿋이 살다가신 딩쉐송 여사의 삶도 그렇구요.    

  3. 善植

    2011년 6월 3일 at 11:56 오후

    인간적 매력이 있어도 김일성정권을 돕고 대한민국을 유린한 중공군의 군가를 작곡한 이를 대한민국이 추앙하고 또 기념제까지 한다니 경악할 일이다. 광주시는 여러가지로 매국을 하는 구나!   

  4. 이근호

    2011년 6월 4일 at 3:24 오전

    아무리 한중 수교를 했다지만, 과거에 그처럼 총을 겨눈 것에 대하여 청산한 바는 하나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런 자를 위하여 한국에서 기념까지 해준다니 어이가 없네요, 대관절 한국인들은 역사의식은 있는건가요? 중국과의 우정이 조상들의 목숨을 팔아먹어도 될 정도로 중요한건가요?   

  5. 김진아

    2011년 6월 4일 at 11:36 오전

    그 시대에서의 선택에 대해선..참으로 복잡 미묘한 시선의 고정이 생기게 됨을 어쩔수는 없지만,

    드물게 살아오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 한점은 가슴 찡한 부분도 느껴집니다.

    …   

  6. 지기자

    2011년 6월 4일 at 3:52 오후

    정율성이 중국 공산정권 출범 이전에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하고 북한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이념의 관점에서는 비판받을 수 있지만, 한 인간이 그 시대에 처한 환경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6.25때 중공군을 도운 조남기 장군이 한국의 초청을 받아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지요.
    과거에만 갇힌다면 한중수교, 한러수교 자체를 하지 말았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총부리를 겨눈 적과도 미래를 위해 악수를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일본, 미국-중국, 프랑스-독일, 인도-파키스탄의 악수가 바로 그렇지요. 이것이 인간의 역사이고, 국제질서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만 얽매이며 원수가 원수를 낳을 뿐입니다. 지금 한중 양국의 무역액은 한미-한일 교역액을 합친 것보다 많습니다. 정율성의 과거에만 얽매이기 보다 그의 예술이 오늘날 한중을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한다는데 의미가 있고, 그런 교류를 통해 한중이 미래로 나갈 수 있다고 봅니다.    

  7. 김한수

    2011년 6월 11일 at 3:34 오전

    하지만 현실은….
    조국 근대화에 앞장선 박정희가 친일파 명단에 끼고
    시일야 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의 훈장이 취소되지만
    공산당의 거두 여운형의 아내는 오히려 국가서훈을 받지요.
    과거에 집착 말라고요?
    끝까지 친일행적 빨갱이행적을 밝혀보자구요. 제대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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