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국에 비수가 될 수 있다
지해범 중국전문기자
<중국 항주 악왕묘의 무릎꿇은 秦檜부부 동상.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에 따르면,岳飛와秦檜의 동상 자리가 서로 바뀌어야 한다>
10년 전 중국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文天祥)에 대한 ‘민족영웅논쟁’이 있었다. 악비는 남송 시대 여진족과 싸우다 화친파인 재상 진회(秦檜)의 모략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장수이다. 문천상은 송 말기 몽골 군에 대항하다 포로가 된 뒤 쿠빌라이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죽음을 택한 충신이다. 중국인들은 그동안 이 둘을 ‘민족영웅’으로 추앙했으나, 2002년 12월 중국 교육부가 ‘고교역사교학대강(敎學大綱)’을 발표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이 지침에 따르면, 두 사람은 ‘국가를 보위하는(保衛國家) 전쟁’이 아니라 ‘형제간에 울타리를 다투는(兄弟鬩墻)’ 국내 민족 간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에 ‘민족영웅’으로 볼수 없다는 것이다. 한족(漢族)인 둘을 영웅으로 칭송하면 다른 소수민족들이 불쾌하게 여긴다는 설명이었다.
일반인의 상식을 뒤집는 중국 정부의 발표 배경에는 ‘중화민족(中華民族)’이란 새로운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이 용어는 현재 중국 영토 안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은 하나의 민족, 즉 ‘중화민족’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전세계에서 온 이주자로 구성된 미국 국민을 ‘미국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괴이한 이 용어를 통해 중국 학자들은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역사관을 만들어냈다. 중국은 오랜 세월 여러 민족이 뒤섞이면서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형성해왔다는 역사관이다. 이는현재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를 다르게 해석하여 타민족의 역사도 중국사로바꿀 수 있다는 논리다. 이 역사관에 따라 중국은 티벳·위구르·몽골의 역사는 물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까지 중국사로 둔갑시키는 동북공정을 단행했다.
중국 국가문물국이 이달초 역대(歷代) 장성(長城)의 길이를 2만1196㎞로 발표한 것도 이민족(異民族)의 역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는 ‘역사 변검술(變臉術)’의 일환이다. ‘역대장성’이란 역대 왕조가 쌓은 장성을 뜻하지만, 중국 언론은 이를 ‘만리장성’과 동일시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장성이 결코 ‘만리장성’이 될 수 없는데도, 중국은 이를 어물쩍 만리장성으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철저히 승자(勝者)의 역사관이다. 땅을 차지하면 그 땅의 역사와 문화도내것이라는 억지다. 이런 역사 제국주의가 과연 중국에도 이로울까? 이는 사기(史記)에서부터 청사(淸史)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기록을 뒤집고 충효의(忠孝義) 등유교적 가치관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일이다. 충의를 다한 악비와 문천상은 ‘형제간에 울타리를 다툰’ 어리석은 장수로 격하되고, 만주족 팔기군에게 산해관을 열어준 오삼계(吳三桂)는 민족단결에 기여한 인물로 둔갑한다. 이런 역사관은 훗날 중국인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올 지도 모른다. 역사의 가정법이지만, 100년 혹은 200년 후에 중국이 다시 외침을 받아, 몽골이나 일본이 한족을 ‘몽골민족’ ‘일본민족’으로 편입해도 할 말이 없게된다.
<사기를 쓴 사마천>
정치적 목적에 따라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고 이민족의 역사까지 자국역사로 조작하는 이런 작업은 궁형(宮刑.거세하는 형벌)의 치욕속에서도 사실에 입각하여 역사를 기록하고자 했던 사마천(司馬遷)의 정신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런 천박한 ‘역사소설’에는 ‘역사’라는 이름조차 붙일 수 없다. 중국 역사학계의 이성적인 학자들이 이런 무도한 역사관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중국의 미래는 결코 밝지 못할 것이다. hbjee@chosun.com
[이 글은 조선일보 2012.6.18자 오피니언면에실린 전문기자칼럼을 첨삭한글입니다.]
hbjee (
오옥자 (
한국인 (
참나무.
2012년 6월 18일 at 10:23 오전
중국의 역사 ‘변검술’- 전문기자 칼럼
오늘 종이신문의 제목과는 다르네요
– 종이 신문 제목은 직접 올리시진 않나요…^^
사슴의 정원
2012년 6월 18일 at 10:34 오전
중국과 인접하여 같이 협력하여 공존하여야 하는 대한민국도
변검술 못지 아니한 정교한 책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과 다 친선관계를 유지하면서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 그러한 외교 책략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지해범
2012년 6월 18일 at 10:38 오전
참나무님,
종이신문 제목은 짧아야하기 때문에 그렇게 붙인 것이구요.
블로그 제목은 좀 길어도 되고 직설적으로 할 수 있으니까…
지해범
2012년 6월 18일 at 10:39 오전
사슴의정원님,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김진아
2012년 6월 18일 at 3:29 오후
아침 신문 제대로 다 읽지 못해서 출근하면서 버스 안에서 찬찬히 다 읽었답니다. ㅎ
석찬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도 신문에서 나온 내용을 언급하시는 선생님이 계시다는군요.
아침마다 꼬박꼬박 읽고 다니는 것이 요즘들어 더 열심이다 했더니 ^^
지해범
2012년 6월 18일 at 4:30 오후
신문을 읽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의 차이는 성인이 되면 분명히 나타날 겁니다.
스스로 판단력을 갖추느냐 그렇지 못하고 남들의 주장에 부화뇌동하느냐로.
풀잎사랑
2012년 6월 18일 at 10:34 오후
블로그에 들어 오기가 여간 힘듭니다.ㅎ
뎃글도 어디로 도망을 가버리고요.
지해범
2012년 6월 19일 at 1:50 오후
사이버 테러 때문인 듯 합니다.
보안이 크게 강화되고 있습니다.
정태덕
2012년 6월 21일 at 7:15 오전
올려주시는글 잘보고있습니다 저도비슷한견해를같고있습니다 담아갑니다 수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