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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6·25 美참전용사의 처참했던 장진호전투 5일 증언
입력 : 2013.06.24 10:35 | 수정 : 2013.06.24 11:35


	1950년 11월 28일 아침 중공군에 유린당한 안곡 방어진지의 모습. 미국 병사들이 전사자를 수습하고 있다. 흰옷 입은 시체는 중공군. 위에 보이는 다리가 풍유리 교량이다. photo ‘장진호 동쪽’
1950년 11월 28일 아침 중공군에 유린당한 안곡 방어진지의 모습. 미국 병사들이 전사자를 수습하고 있다. 흰옷 입은 시체는 중공군. 위에 보이는 다리가 풍유리 교량이다. photo ‘장진호 동쪽’

로이 애플맨의 명저 ‘장진호 동쪽(East of Chosin)’이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1987년 미국에서 ‘장진호 동쪽’이 나온 지 26년 만이다. 장진호전투는 미국 전사(戰史)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로 꼽힌다.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넌 중공군은 동부전선 장진호 주변 산악에 매복하고 있다가 11월 27일 밤부터 12월 1일까지 유엔군에 대한 대공세를 가했다. 맥아더 사령관은 중공군 개입을 확인한 뒤 11월 30일 철수 명령을 내린다. 책 ‘장진호 동쪽’은 장진호 동쪽의 안곡에 숙영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미31연대전투단(3000여명)의 전쟁 일지다. 책을 낸 다트앤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일부를 발췌·소개한다. < 편집자 주 >

1950년 11월 26일 의미심장한 사건이 발생했다. 16:00경, 유담리 남서쪽 2마일 지점에서 중공군 3명이 전단을 들고 해병 제7연대 정찰대에 투항해 왔다. 그들은 닷새 전인 11월 21일 중공군 제60사단에서 탈영했다. 그들은 다른 사단과 함께 11월 11일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와 20~21일 유담리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임무는 미국 2개 연대가 유담리 서쪽에 있는 자기네 진지를 통과하고 나면 유담리 남서쪽에서 해병대의 주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라고 했다. 공격은 오직 밤에만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 한국 민간인도 해병대 심문관에게 중공군들이 어두워진 후에 이동한다는 믿을 만한 이야기를 했다. 이 첩보는 중공군 제20군의 4개 사단이 지금 장진호 지역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놀랄 만한 첩보는 26일 오후 제10군단에 전달되었지만, 장진호 동쪽에 육군부대에 전파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장진호전투를 통틀어 이상한 일 중의 하나는 해병 제1사단과 육군 제31연대전투단 사이에 통신이 두절되어 있었던 점이다. 그들의 무전기는 같은 주파수에 연결되지 않았고, 다른 수단으로도 교신되지 않았다.

첫 번째 밤, 11월 27~28일
23:00 직전, 대대 지휘소에 있던 사람이 A중대 진지에서 나는 산발적인 소총 소리를 들었다. 그 총소리가 큰일의 시초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은 중공군이 나타난 것이었다. 중공군 하나가 생포되었고 나머지는 흩어졌다. 적 정찰대는 그후 1시간 동안 중대방어선을 정탐했다. 그런 다음 자정 직후부터 중공군이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중대방어선 중앙 좌측 바로 뒤에 있던 스탬포드는 자정이 지난 얼마 뒤 사격소리와 스쿨리온 대위가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는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는 벙커 밖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뒤쪽 끝에 있는 판초를 옆으로 밀어제쳤을 때 스탬포드는 달빛 속에서 털모자를 쓴 얼굴을 봤다. 그는 앉은 자세로 사격을 가했으나 중공군은 이미 수류탄을 벙커 안으로 던져넣었고, 스탬포드 다리 사이 침낭 위에서 터졌다. 파편이 그와 같이 있던 다른 한 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나 그는 멀쩡했다.…
야간작전을 위해 C중대에 배속된 D중대 중기관총 사수 아르멘트라우트 상병은 거의 혼자서 진지를 지키고 있었다. 중공군 한 무리가 기관총을 향해 험준한 산비탈을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사격탄도가 맞지 않아 사격이 정확지 않자 기관총을 뽑아서 양팔에 안고는 중공군을 향해 사격을 가해 모조리 죽였다.…
모트루드의 C중대 3소대 진지에서는 날이 밝자 아주 괴기스러운 광경이 드러났다. 소대 진지 좌측 끝에 있는 개인호에서 카투사 한 명이 머리가 없는 채 앉아 있었다. 그의 무기와 탄약은 사라지고 없었다. 공격이 시작될 무렵 자거나 졸고 있는 카투사에게 중공군이 포복으로 접근하여 그를 죽이고 머리를 가져간 증거임에 분명했다.

두 번째 밤, 11월 28~29일
28일 하루 종일, 중공군은 고지에서 안곡 지역을 감시했다. 그들은 맥클리몬트가 지휘하는 D포대의 M19와 M16이 방어선 안으로 들어가서 그 두려운 화기가 조심스럽게 각각 진지를 잡는 것을 지켜보았다.…중공군은 28일 어둡기 전에 안곡 방어진지에 대한 전투를 재개했는데, 너무나 격렬해서 밤이 되기 전에 끝장낼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공격은 방어선 동쪽에 있는 보병 진지에서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중공군은 기관총 한 정을 탈취했고, 얼마 동안 K중대 지역에 돌파구를 형성했다.…
보병방어선의 기관총을 덮쳤던 중공군은 곧바로 사살되었다. 밤중에 적 일부는 포병이 있는 데까지 돌파해 왔지만 포병들은 대포와 함께 물러서지 않았고 근처에 있던 M19의 도움을 받아 중공군을 사살하거나 격퇴시켰다. 안곡에서 전투는 밤새도록 계속되었고 치열했다. 일시적인 적의 돌파가 여러 군데 있었지만 모두 회복되었다. 동틀 무렵 방어진지는 비록 비틀거리기는 했었지만 여전히 확보되고 있었다.
새벽이 되기 전, 적이 서쪽에서 안곡 옆 철로와 도로를 따라 접근하는 불길한 전투양상이 새롭게 전개되었다. 이들 적은 남쪽에서 왔다. 방어진지 서쪽 부분에 대한 이들의 공격은 가장 오래 계속되었다. 그들은 날이 밝은 직후 철수하기 전에 안곡과 방어진지 사이에 있는 지대를 점령했다.… 방어진지의 맥클리몬트 대위와 부하 몇명은 중공군 시체를 모아서 쌓아두었다. 2명은 아직 살아 있었는데, 한국군 병사에게 4000명의 중공군이 미군을 포위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공군 지휘관들은 대공포를 파괴하는 병사에게 아주 큰 포상을 약속할 정도로 큰 가치를 두고 있었다.

세 번째 밤, 안곡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팽팽한 고요는 자정 직전 방어진지에 있던 포병과 박격포가 사격을 개시하면서 끝이 났다. 곧이어 중공군의 기관총과 소총 사격이 가세했고, 그들이 공격하면서 쏘아대는 총알이 머리 위로 지나갔다. 첫번째 공격은 B중대와 A중대가 점령하고 있는 방어진지 남쪽에 있는 능선과 내리막 산비탈에서 시작되었다. 이 충돌은 약 1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만약 중공군이 새로 도착한 부대를 시험해 보기를 원한 것이었다면 그들은 후회했을 것이다. 그들은 많은 인원이 죽고 부상당하는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들은 방어진지에 들어오지 못했고, 끝에 가서는 수많은 나팔을 불어대며 철수했다.…
30일 일찍, 모트루드 소위는 부상자 후송을 위한 헬리콥터 착륙장을 소대지역에 있는 안곡 물가에다 만들라는 명령을 받았다. 정오 전에 바르 소장의 헬리콥터가 착륙장에 내렸다. 바르 장군은 곧바로 페이스 중령과 개별 면담에 들어갔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고, 페이스 중령도 참모들에게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 장군이 그날 하갈우리에 있는 스미스 장군에게로 돌아간 뒤 했던 것에 주목해 볼 때, 페이스 중령은 탈출을 시도하더라도 데리고 가야 할 500명의 부상자가 있다는 것을 사단장에게 강조했던 것 같다.
11월 30일 오후, 제 31연대 후방부대와 드레이크의 제31전차 중대는 후동리에서 하갈우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부대는 16:00경에 몇 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다른 전차는 후방을 엄호하면서 후동리에서 철수를 시작했다. 어두워질 무렵, 안곡의 페이스 특수임무부대는 홀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과 하갈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우군 부대도 없었다.

안곡의 네 번째 밤 11월 30일~12월 1일
안곡에서는 중공군이 어둡고 긴 밤을 이용하여 특수임무부대를 공격할 것이라는 게 거의 확실했다. 부대에는 모든 종류의 탄약이 부족했고 3일 밤낮의 전투로 피로했지만 보초를 설 때는 깨어있으려고 애를 썼다. 적의 박격포 사격이 20:00경에 시작되어 탄막사격 수준으로 약 45분간 지속되었다. 경험 많은 병사들은 보병 공격의 전주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모두 개인호 속에서 몸을 낮춘 채 직접 사격을 피했다.
12월 1일 03:00쯤, 중공군은 드디어 방어진지 북동쪽 모퉁이를 돌파했다. 그 결과 방어진지 서쪽 끝까지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봉우리가 적의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공군은 날이 밝았는데도 방어진지 어디에서도 물러나지 않았다. 커티스는 날이 밝은 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12월 1일 아침,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방어진지 내부 광경을 상세하게 묘사하려는 시도는 대학살을 표현해 내는 모험과 같다. 그러므로 할리우드라 해도 이 잔혹하고 적나라한 비극적 모습을 완전하게 복원하지는 못할 것이다. 12월 1일 새벽까지 특수임무부대 구성원들은 영하의 날씨 속에서 80시간 동안 공격을 받았다. 충분히 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수나 면도를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극히 최소한의 음식물 이상은 아무도 먹지 못했다. 어두울 때 중공군은 나팔, 호루라기, 화염, 따발총 같은 공포심을 자아내는 무기와 침투전술로 끊임없이 괴롭혔다. 너무나 단단하게 얼어서 땅을 팔 수가 없었기 때문에 소총수들과 화기요원들은 아주 얕은 구덩이를 점령해야 했다.…”

12월 1일 안곡 방어진지에서 탈출
11:00 부대는 이동할 준비를 갖췄다. 도로 위에는 차량 종대가 위치하고, 포병과 박격포대원, 걸을 수 있는 본부 부상병들이 차량 양쪽에 줄을 섰다. 이제 공중 엄호기만 도착하면 됐다. 탈출 준비를 지켜본 중공군은 방어진지에 대한 박격포를 집중시켜 사상자가 속출했다. 콜세어기 4대가 13:00 직전에 안곡 상공에 도착했다. 콜세어기는 방어진지를 압박하는 네이팜탄을 떨어뜨렸는데 너무 앞쪽에 떨어지는 바람에 도로 왼쪽에 있던 우군에게 사상자가 발생했다. 미군 보병들은 패닉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팜탄은 중공군을 혼비백산케 했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계곡을 따라 탈출이 시작되었고 중공군은 각종 화기를 종대행렬에 쏟아부었다. 전투를 하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전사자가 속출했다. 차량 종대가 첫 번째 교량에 도착한 시각은 15:00. 어떤 누구도 교량이 폭파되어 있다는 정보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끊긴 다리를 돌아가기 위해 부대는 늪으로 변한 개울을 건너기 시작했다. 차량의 바퀴가 진흙에 빠져 꼼짝달싹 못했다.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속출했고 예상치 못한 시간이 소비됐다.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의 항공기 지원이 어렵게 되자 1221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이 강화되었다. 특히 1221고지의 적을 무력화시키지 못하면 더 이상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사상자가 늘어갔고 탄약은 점점 부족해져갔다. 결국 1221고지 공격을 감행했다. 여기에 군의관 보좌관 한국인 의사 이용각도 참여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1221고지를 탈환했다. 페이스 중령은 1221고지 산비탈에서 중공군이 던진 수류탄을 맞았다. 페이스 중령은 호송부대에 의해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호송부대를 격파하며 유린했다. 이 과정에서 페이스 중령을 포함한 수많은 장교와 병사들이 사망했다. 중공군은 얼어붙은 장진호로 들어가는 길을 제외하고는 유엔군을 완벽하게 포위했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생존자들이 각기 소규모 그룹을 형성하며 장진호 남쪽 하갈우리에 도착한 것은 12월 1~2일 밤이었다. 장진호 서쪽에서 역시 철수한 해병 제1사단이 하갈우리에 집결했다. 부상 없이 도착한 제31연대 전투단은 385명이었다. 12월 2일 960명의 사상자가 비행기로 하갈우리를 떠났다. 이렇게 12월 5일까지 총 4081명의 사상자가 하갈우리를 떠났다. 나머지 병사들은 도보로 흥남부두에 도착했다. 이어 민간인 9만8000여명을 탈출시키는 흥남 철수 작전이 전개된다.


	6·25 美참전용사의 처참했던 장진호전투 5일 증언

◇저자 로이 애플맨과 역자 허빈
‘장진호 동쪽’의 저자 로이 애플맨(Roy Appleman)은 미국의 저명한 군사역사가로 태평양전쟁, 6·25전쟁과 관련한 다수의 저서를 남겼다. 1904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난 애플맨은 오하이오주립대를 거쳐 1935년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하면서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했다. 애플맨은 1942년 사병으로 입대했고 1943년 간부후보생을 거쳐 소위로 임관한다. 1945년 오키나와 전투 당시 미군 제10군단 소속 대위로 참전해 전사연구가로 활동했다. 2차대전 종전 후 1947년 사서전문가 이레느 화이트와 결혼해 자녀 셋을 두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10군단(알몬드 소장) 소속 중령으로 전사연구가로 참전했다. 1954년 중령으로 예편한 뒤 그는 6·25 전쟁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역사서를 쓰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 쓴 책이 1961년에 출간된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South to Naktong, North to the Yalu)’였다. 두 번째 책이 1987년에 출간된 ‘장진호 동쪽’이었다. 애플맨은 장진호 동쪽에서 생존한 미군 병사들을 일일이 인터뷰해 장장 7년에 걸쳐 이 책을 완성했다. 이어 1989년 ‘한국에서의 재앙(Disaster in Korea)’, 1990년 ‘리지웨이, 한국을 위해 투쟁하다(Ridgway Duels for Korea)’, 1990년 ‘함정을 탈출하다(Escaping the Trap)’를 잇따라 출간했다. 1992년 사망했다.
역자 허빈씨는 1942년 경북 경산 출생의 소설가. 본명 허광웅인 역자는 경북사대부고를 졸업하고 1962년 갑종 180기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제56사단 제219연대장·월남전 참전·육군보병학교 전술학 교관·제1군수지원사령부 참모장 등을 거쳐 1991년 육군대령으로 예편했다. 1991년 연합뉴스로 옮겨 비상계획부장과 총무부장을 역임했다. 2008년 문학계간지 ‘문학과 의식’을 통해 소설가로 데뷔해 2010년 창작집 ‘첫사랑 마지막 사랑’을 출간했다. 허씨는 베트남전 당시 대대장을 주인공으로 하는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관류하는 장편소설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면서 ‘장진호 동쪽’을 접하게 되어 읽던 중 주간조선 2012년 6월 4일자 기사 ‘중공군 30만명 밤바다 공격 2개 대대 이틀 만에 절반 전사’ ‘카투사 875명 그들이 대한민국을 구했다’를 읽은 뒤 생각을 바꿔 ‘장진호 동쪽’을 번역하기로 했다. 허빈씨는 “군사용어와 6·25전쟁사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번역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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