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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Why] “중국이 왜 이따위가 됐지 톈안먼서 내 초상화 떼” 마오가 살아나면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입력 : 2013.09.28 03:03

6년만에 다시 訪韓, 중국의 인기 베스트셀러 작가 ‘허삼관 매혈기’의 위화 인터뷰

中 자본주의 오래 못갈 것
빈부격차·부패 등 보며 인민 상당수 마오 그리워해
淸 왕조 무너뜨린 신해혁명 재연될 수도

난, 온건한 중국 비판가
중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 우회적 방식으로 비판…
이번 신간 ‘제7일’ 출간땐 두 출판사서 퇴짜 불이익

이 뽑는 사람서 소설가로
大入 낙방, 拔齒師로 근무… 입안 들여다보기가 싫어 소설 써 잡지사에 투고
1983년 단편으로 작가 데뷔

허삼관 매혈기 한국서 영화로
영화 제작자 안동규 사장, 10년 정성에 영화화 허락
배우 하정우가 연출·주연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할것”

톨스토이 가장 좋아해
안나 카레니나 가장 위대… 그 두꺼운 것 세번 읽어, 5년후 한번 더 읽을 겁니다

시신 안치소의 서늘한 추억
어릴적 병원 관사서 거주… 더우면 시신 안치해두는 시멘트 침대로 달려갔죠
공포 아닌 행복감 만끽하러

보시라이 재판 짜증 나
中정부, 웨이보에 중계하며 유리한 내용만 골라 올려…
인민을 구워 삶으려는 그들의 행태에 실망


	중국의 현대를 가장 잘 그리는 작가로 꼽히는 위화를 26일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중국의 현대를 가장 잘 그리는 작가로 꼽히는 위화를 26일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8년 만의 장편소설 ‘제7일’을 낸 그는 “문학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것은 좋은 책, 좋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세계의 주목을 받은 전 충칭시 서기 보시라이의 재판에 대해 “중국 지도부는 재판을 웨이보(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중계하면서 인민을 구워삶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말 짜증 났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현대 중국을 가장 잘 그리기로 이름난 위화(余華·53)가 서울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지난 26일 저녁 그를 만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갔다. 중국 베이징(北京)에 사는 그는 한 시간여 비행이 끝나자마자 급한 듯 담배를 피워 물었다. 약간 늘어진 줄무늬 셔츠에 낡은 듯한 고동색 재킷 차림이었다. 자전거 공장 같은 곳에서 어울릴 듯한 행색이었다. 그는 베이징의 미국 대사관 앞에 사는데 그 앞을 지날 때 ‘불심 검문’을 종종 받는다고 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묻는 식이지요. 얼마 전엔 한 ‘상방자(上訪者·시골에서 베이징으로 가서 항의하는 민원인)’가 나서서 공안에게 ‘이 사람 공민이오.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이란 말이오!’라고 나 대신 따져줍디다."

위화가 할 줄 아는 언어는 오직 중국어다. 그는 항저우(杭州) 출신답게 그 지역 억양을 많이 섞어 썼다. 위화의 책은 엄청나게 팔리지만 그는 다작(多作)과 거리가 멀다. 30년 동안 낸 장편 소설이 다섯 편뿐이다. ‘형제'(2005년) 이후 8년 만에 낸 다섯 번째 장편소설 ‘제7일’은 사후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중국 사회의 모순을 그렸다. 헤어진 아내의 자살 소식을 듣고 넋이 나가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주인공 양페이가 죽은 직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엔 안개 같은 축축한 쓸쓸함이 배어 있다. 남자친구가 짝퉁 아이폰을 선물했다는 사실을 안 젊은 여성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한 자녀 정책 때문에 태어나기도 전에 목숨을 잃은 아기들은 사후 세계에서 노래를 부르며 산다. 추모해줄 가족도, 친구도 없는 주인공 양페이는 스스로 낡은 양복을 잘라 팔에 상장(喪章)을 단다.

그는 이번 소설을 ‘차시환혼(借尸還魂)’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중국에 전해오는 전술 중 하나로 그대로 풀면 ‘죽음을 빌려와서 영혼을 살려낸다’는 뜻이다. 그는 "나는 사회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동원했고 혼신을 다했다"고 했다. ‘인생’ ‘허삼관 매혈기”형제’ 등에서 중국 문화혁명(1966~76) 때의 왜곡된 삶을 그려왔던 그는 이번 소설을 통해 ‘지금의 중국’으로 돌아왔다. 독자를 숨 막히게 했던 리얼리티는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허구의 세계로 무대를 옮겼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다. 그에게 중국의 사회, 그리고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공항 라운지에 마주 앉았다. 6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는 그는 ‘카페 아메리카노’를 마시겠다고 했다.

◇"나에게 소설은 ‘긴 아픔’이다"

―왜 이렇게 슬픈 소설을 썼나. ‘사후 세계’라는 배경도 특이하다.

"심리적으로 내가 변한 것은 없다.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지금의 중국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사후 세계’라는 관점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처음 쓰기 시작한 1980년대에 비해 오늘날의 중국 사회는 훨씬 황당하기 때문이다. 렌즈로 치면 광각(廣角)렌즈처럼 크게 보고, 주인공들을 두껍게 그리고 싶었다."

―부모님이 의사고 어릴 때부터 병원에서 살지 않았나. 죽음에 대한 관점이 남다를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 병원 숙사에 살았다. 우리가 사는 건물 바로 맞은 편에 시체 안치실이 있었다. 나는 거의 사람들의 울음소리에 묻혀 살았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화장되기 전에 잠시 머무는 곳이 바로 안치실이다. 병원에서 살던 10년 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울음을 들은 것 같다. 시체 안치실엔 시체를 누이는 시멘트 침대가 하나 있었다. 여름에 더우면 나는 그 시멘트 침대 위에서 그 시원함을 만끽하기도 했다. 그 시원함은 나에게 무섭다기보다 행복하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었다."

―이번 소설을 쓰는 데 8년이 걸렸다. 소설 쓰는 데 유난히 오래 걸리는 듯하다.

"작가마다 글 쓰는 방식이 다 다르다. 한숨에 써내려가는 사람이 있고 계속 글을 잡고 있는 사람도 있다. 나는 모옌(莫言·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이 글 쓰는 방식이 부럽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생각을 한 다음에 그 생각이 충분해지면 한숨에 글을 써내려간다. 나는 그에게 당신은 (글 쓰면서) 짧게 아픔을 겪고, 나는 길게 아픔을 겪는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에게는 그런(단숨에 쓰는) 능력은 없는 것 같다."

―한국인을 포함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허삼관 매혈기’를 보고 가장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광범위한 매혈 행위 그 자체였다. 지금도 상황은 비슷한가.

"1970년대 매혈 마을이 중국 곳곳에서 생겨났다. 마을 사람 전원이 피를 팔아서 먹고사는 것이다. 매혈은 질병 전염과 에이즈로 이어졌고, 어떨 때는 매혈 마을이 에이즈 마을이 되기도 했다. 당신을 겁주려는 게 아니라, 내 소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중국의 현실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매혈 문화는 여전하지만 형식은 변하고 있다. 예전엔 피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아서 피를 팔려면 뇌물을 먹여야 했다. 피를 팔려고 몸을 파는 여자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피가 귀해져서 전과는 상황이 달라졌다. 그러자 전에 없던 현상이 생겼다.

‘피 값’이 마을마다 다르다는 것을 파악해 ‘피 중개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중개인은 1000명을 모아서 피에 비싼 값을 쳐주는 동네에 데려가기도 했다. 매혈의 자유시장화(化)랄까, 하하. 가장 최근에 나타난 현상은 의사가 직접 매혈 중개인이 됐다는 것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하정우가 연출·주연을 맡는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위화는 "10년 동안 제작자인 안동규 사장이 이런저런 한국 영화들을 보여주면서 ‘허삼관 매혈기’를 영화로 만들겠다고 했다. 그사이에 몇 번이나 연출과 배우가 바뀌어왔다"고 했다. 위화의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장이머우 감독의 ‘인생’ 이후에 두 번째다.

―’허삼관 매혈기’와 하정우가 어울릴까?

"내가 본 하정우의 영화에서 그는 매우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줬다. 연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하리라고 생각한다. 몇몇 감독들은 소설을 영화화하면서 ‘원작에 충실했다’고 하는데 그건 멍청해서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원작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잘 해석하는 게 좋은 감독이다."

―장이머우의 ‘인생’은 어땠나.

"장이머우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나는 소설도 영화도 다 좋았다고 생각하는데 내 주변 사람들은 소설이 낫다고 하더라. 장이머우 감독 주변 사람들은 뭐, 영화가 낫다고 하겠지?"

◇"인민 구워삶으려는 지도부, 짜증 났다"

최근 한국과 미국에선 ‘보시라이(薄熙來) 재판’이 화제가 됐다. 충칭(重慶)시 서기였던 그는 뇌물 수수 등의 죄로 무기징역과 개인 재산 몰수를 선고받았다.

―보시라이 재판이 지금의 중국에 대해 무엇을 말해준다고 보나.

"많은 중국인이 보시라이를 지지하고 있다. 지도부는 보시라이 재판의 진행 상황을 웨이보(微博·중국판 트위터)를 통해 중계를 하면서 ‘우리가 투명하게 재판을 공개한다’고 인민들을 구워삶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지도부에 유리한 내용만 골라 올렸다. 나는 그런 지도부의 행태가 정말 짜증 났다. 그리고 별 효과도 없는 것 같았다."

―재판이 공정하지 않았다는 건가.

"보시라이는 충칭에서 시장을 할 때 중국 법을 어긴 적이 분명 있다. 그런데 이번 재판을 진행하면서 재판부도 공정하지 못했다. 적법한 순서에 따라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다. 양쪽 모두 법을 어겼다… 그러니까 재판부가 보시라이식으로 보시라이를 대적했고 그걸 보는 게 짜증이 났다."

위화는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이렇게 정부를 우회적으로 비난했다. "사회를 압력솥이라고 한다면 비난의 목소리는 압력솥의 배출구 비슷한 역할을 한다. 몇몇 사람들은 칙칙거리는 이 소리가 거슬린다고 생각해 배출구를 막아버리길 원한다. 솥이 폭발하는 데 대한 두려움은 없어 보인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죽은 돼지는 끓는 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중국 지도부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인 것 같다. 반체제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처럼 감금되거나 할까 봐 두렵지는 않은가.

"내가 글을 통해 사회를 비평하는 방식이 아이웨이웨이보다 훨씬 온화하다고 본다. 나는 내가 소설을 쓰는 방식을 ‘5월 35일적인 방식’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중국 정부는 1989년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생한 날인 ‘6월 4일’을 인터넷에서 차단하고 있다. 그러자 중국 네티즌들은 이를 ‘5월 35일’이라는 말로 우회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는 내 작품 속에서 이런 우회적인 방식으로 중국 사회를 비판한다. 이번 소설이 특히 그렇다. 솔직히 나는 정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출판 허가는 잘 났나.

"어떤 사람들은 ‘이런 책은 위화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중국의 모든 출판사는 국영이어서 정부의 입장에 서기 마련이다. 그러나 기업이란 국영이건 민영이건 이윤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에 정부의 제재라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내 책을 낼 수밖에 없다. 잘 팔리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 책을 내려고 할 때 두 개 출판사에서 거절을 당해야 했다."


	중국 작가 위화가 26일 인천공항에서 자신의 책 ‘제7일’의 한국어판을 보며 웃고 있다.
중국 작가 위화가 26일 인천공항에서 자신의 책 ‘제7일’의 한국어판을 보며 웃고 있다. 이 소설의 배경은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허구의 세계다. 그는 “소설이라는 도구를 통해 지금의 중국 사회가 가진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는 ‘사후 세계’라는 관점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김연정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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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보라, 얼마나 좋나"

위화의 첫 번째 직업은 ‘뽑치’, 즉 이를 뽑는 발치사였다. 특별한 교육을 받았거나 발치사가 되려고 희망한 적도 없었다. 열여덟 살 때 그저 국가가 정해주는 대로 가서 일했다.

―부모님이 모두 의사신데,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갈 생각은 안했나.

"나는 문화혁명이 시작할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끝나던 해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문화혁명은 권위에 도전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선생님을 비난하고 그 권위에 도전해야 칭찬을 들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공부를 안 했다는 뜻이다. 나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중학교에 구경을 갔던 첫날을 잊을 수가 없다. 모든 학생은 창문에 매달려서 운동장에서 하는 축구 경기를 구경하거나, 교실에서 왁자하게 떠들고 있었다. 선생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데 칠판에서 혼자 소리 내어 문제를 풀더라. 나와 친구들이 놀라 형들에게 ‘수업 시간인데 왜 공부를 안 해요?’라고 물었다. 그 형은 웃으면서 책상에서 분필 조각을 꺼내 선생님에게 던지더니 ‘이게 혁명이다’라고 하더라. 선생님은 분필을 살짝 피하고 다시 문제를 풀고…. 시골에서 그런 식으로 학교에 다녔는데 대학은 무슨 대학인가. 고등학교 졸업 직전에 대학 시험이라는 걸 보라고 해서 시험을 보긴 했다. 합격자 발표 날 선생님이 들뜬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기에 기대를 했더니 그러더라. ‘너희 다 떨어졌다’고, 하하."

―발치사 생활은 어땠나.

"당시엔 어차피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박봉에 대한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입안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주 고역이었다. 입안은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곳이다. 5년 동안 내가 뽑은 이가 1만개가 넘는다면 대충 상상이 되지 않나. 그렇게 정신 없이 이를 뽑던 어느 날 창밖을 내다보는데 앞 건물인 문화원 사람들이 하릴없이 거리를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들은 왜 일을 안 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거리를 오가는 것이 자기네들이 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문화원은 나라가 돈을 대서 문학 작품을 만들어내는 곳이고, 소설가가 되면 거기서 일할 수 있다고 하더라. 그때부터 여기저기 문학잡지에 소설을 써서 보냈고 1983년 11월에 내 소설 ‘첫 번째 기숙사’를 싣기로 했다는 ‘베이징문학’의 전화를 받았다. 결국 문화원에 자리도 얻었다."

―실제로 그렇게 한가하게 일하던가.

"진짜 그랬다. 출근 첫날 두 시간 늦게 출근을 했는데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온종일 일해야 하는 가난뱅이가 하루 종일 빈둥대도 되는 가난뱅이가 된 것이다. 나는 출근해서 잠을 자며 정오 정도까지 빈둥거리다가 집에 가서 소설을 썼다. 점차 한 주에 한 번씩 출근을 했고, 나중에는 한 달에 하루 출근을 했다. 월급 받는 날에 월급봉투를 받으러 간 거였다. 공산주의가 돌아가는 게 그렇다, 하하. 친구들은 나한테 그런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좋은 것만 빼먹는 놈이라고. 공산주의일 때는 제대로 일도 안 하고 나라가 주는 작가 월급을 받다가, 자유시장이 열리니까 로열티를 받아먹는다고."

―문학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나는 문학가에게 있어 타고난 재능이 중요하고, 노력도 중요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운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를 보면 운이 제일 좋고, 그다음이 재능이고, 그다음이 노력인 것 같다. 나는 원래 노력하는 것을 싫어한다."

―문학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너무나 간단하다. 좋은 책, 좋은 글을 쓰는 것이다. 거창한 목표 같은 것은 없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는 톨스토이다. ‘왜’라고 물으면 나는 그저 ‘안나 카레니나를 보라. 얼마나 좋나’라고 답한다. 나는 그 책이 내가 읽은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벌써 세 번이나 읽었고 5년쯤 뒤에 한 번 더 읽을 계획이다. 그런 책을 쓰고 싶다."

◇"중국에 빈곤이 창궐하는 한, 해적판 책을 허하라"

위화는 최근 뉴욕타임스에 중국에 횡행하는 해적판 서적에 대한 글을 썼다. 중국에 이렇게 빈민이 많은 이상 해적판 책도 정당하다는 내용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정말로 당신 책의 해적판 버전을 봐도 화가 안 나나.

"이번 소설 제목(‘제7일’)처럼, 정말로 책 나온 지 딱 7일이 되니까 사방에 해적판이 깔리더라. 내가 자꾸 쳐다보면 판매상이 책이 재미있다며 권하기까지 한다. ‘해적판 아닌가요’ 하고 물으면 발끈한다. ‘이건 해적판이 아니라 산자이(山寨)’라고."

‘산자이’는 중국산 모조품을 뜻하는 말이다. 원래는 ‘울타리를 갖춘 산장’이라는 뜻인데 ‘가난한 지역’으로 의미가 확장됐고, 최근에는 정부가 관여하지 못하는 모방품이라는 뜻으로 흔히 쓰인다.

―당신이 본 가장 황당한 산자이는 뭐였나.

"나에 대한 ‘산자이 인터뷰’를 종종 본다. 한 번은 인터뷰도 하지 않고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썼기에 기자에게 물었더니 너무 태연하게 답하더라. ‘아,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산자이 기사예요.’ 이제는 대응 안 한다. 중국에선 이런 일이 너무나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문인이 중국에서 해적판을 없애야 한다고 운동도 하고 그러는데, 나는 그런 것에 한 번도 참여해본 적이 없다. 중국의 산자이는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현상인 것 같다. 중국의 살인적인 물가 상승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빈민층이 너무 많다. 이런 빈곤과 양극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그때까지는 내 책도 산자이로 팔려나가는 게 옳다."

―한국에도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속담이 있다.

"나는 동의하지만… (한국) 출판사는 아닐 것 같다, 하하."

◇"중국은 마오쩌둥을 그리워하고 있다"

―중국에 또 큰 변화가 닥칠까.

"나는 혁명이 다시 올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과거 문화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말이 혁명이지 마오쩌둥(毛澤東)이 좌지우지하고 틀어쥐어서 추진했던 것이다. 만약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정부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될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청 왕조를 무너뜨린 것과 비슷한, 그런 혁명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금의 중국식 자본주의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뜻인가.

"다른 나라 사람들은 중국식 자본주의라고 하는데, 우리는 중국식 사회주의라고 얘기한다. 뭐, 그게 그거다. 나는 오래가지 못하리라고 보는데 ‘오래’가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스무 살인 우리 아들 세대도 한 번 정도는 큰 변화를 겪지 않을까 싶다."

―아들은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나.

"아들은 현재 미국에 유학 중이다. 자기가 원해서 보냈다. 경제도, 영어도 좋다고 하고 취미도 많다. 어떤 사람이 되건 상관없다. 그저 내 아들이면 된다."

―얼마 전 중국에 갔더니 오바마와 마오쩌둥을 합성한 ‘오바마오’ 기념품이 인기더라. 마오쩌둥은 이제 중국에서 하나의 ‘팝 문화’가 된 건가.

"많은 사람이 마오쩌둥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근 중국 인터넷엔 이런 농담이 돌았다. ‘중국 과학원이 마오쩌둥을 복제했다. 뉴스가 전해지자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의 철거를 명령했고 미국은 사흘 이내에 타이완관계법을 폐지하고 아시아에 배치된 미군 병력을 철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도 정식으로 6자회담 대표에게 전화통지문을 보내 모든 일을 마오 주석의 지시에 따라 실행하겠다고 밝혔다.’ 마오쩌둥 사후에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빈부격차, 환경오염, 탐관오리 부패 등을 보면서 사람들은 마오쩌둥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마오의 시절이 그립나.

"뿌(不·아니)! 절대 절대, 문화혁명 시절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형제’에서 문화혁명 시절을 그렸는데,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섬뜩했다."

―그래도 사람들이 ‘중국’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미지가 톈안먼 광장의 마오쩌둥 초상화다. 그 초상화는 언제까지 붙어 있을까.

"마오가 다시 살아나서 지금의 중국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중국이 이따위가 될 줄 몰랐어! 당장 내 초상화를 떼어내!’"

―당신은 삶이 슬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불면증에 종종 시달려 수면제를 먹기도 하고 폭력적인 악몽도 자주 꾼다. 문화혁명 때의 섬뜩한 기억과 지금 중국의 현실은 슬프다. 그러나 현실이 슬픈 것이지 인생이 슬픈 것은 아니다. 작가가 미치도록 기쁜데 슬픈 글을 쓸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지 않나. 나는 사회와 삶도 일치시키지 않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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