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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스크랩]    “좋든 싫든, 우리는 박정희의 遺産(유산) 아래 살고 있다”
입력 : 2014.08.29 03:02

박정희 前 대통령 정치사상 분석 ‘한국 현대 정치…’ 낸 강정인 교수

"한국의 경제 발전 이끈 지도자… 동시에 독재·부패 대한 책임자
박정희보다 나은 대안 있냐는 질문 ‘그렇다’ 란 답변 나오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근대 국가 기반을 닦은 정치인이다. 오늘의 한국인은 원하든 원치 않든, 그가 남긴 정치적 유산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

정치학자 강정인(60) 서강대 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의 정치사상을 분석한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아카넷)를 냈다. ‘우리 민족의 나갈 길’ 등 저서와 1961년 5·16 이후 연설문을 1차 자료 삼아 박 대통령의 정치사상을 분석한 책이다. 지난 27일 찾은 강 교수의 연구실 책상 위엔 박정희 대통령 연설문집(총 7권)이 놓여 있었다. 대학원 제자들과 함께 연설문 주요 대목을 요약해 컴퓨터에 입력한 것만 A4용지 1000쪽 분량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자신은 정치가가 아니라 행정가라고 했고, 학자들도 대부분 그를 실용적이고 행정적인 인물로 보기 때문에 무슨 정치사상을 연구할 게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한국 현대 정치의 중요한 이념 축인 자유주의, 보수주의, 민족주의, 급진주의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장은 한국의 보수와 진보 진영 양쪽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고요."


	(왼쪽 사진)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1년 2월 20일 전국 연두 순시를 마치고 수행원들이 탄 버스에 올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강정인 교수는“좌파 진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와 근대화에 미친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박정희 향수’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왼쪽 사진)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1년 2월 20일 전국 연두 순시를 마치고 수행원들이 탄 버스에 올라 경부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오른쪽 사진)강정인 교수는“좌파 진영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와 근대화에 미친 공로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박정희 향수’를 불러오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조선일보 DB·이덕훈 기자

강 교수가 파악한 한국 정치의 이념적 특징은 ‘비동시성의 동시성’과 ‘민족주의의 신성화’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은 부르주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유주의가 들어오고, 확고한 노동자층이 없는 가운데 사회주의가 들어와 공존하는 등 비(非)서구사회의 이념적 특징을 짚은 것이다. 강 교수는 "박정희의 경우, 권위주의적 통치를 하면서도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둘이 동시에 공존하는 특징을 보인다"고 했다. 민족주의는 식민지와 분단을 겪으면서 신성화돼 왔는데, 박정희는 반공과 근대화를 내세우면서 민족주의에 호소함으로써 대중을 동원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이끌어내는 도구로 활용했다고 설명한다. "재밌는 사실은 1970년대 말까지 민족주의는 박정희를 비롯한 우파의 담론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80년대 이후 좌파 진영에서 민족주의를 내세우며 가져가 버렸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뜨거운 이슈다. 대한민국에선 박 대통령을 어떻게 보느냐가 그 사람의 정치 성향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된 지 오래다. 강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 발전을 이끈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독재와 인권 탄압, 부정부패에 대한 책임자"라고 했다. "하지만 좌파 진영에서 박 대통령이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끈 공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근대화에 참여했던 분들이 더 반발하는 거고요."

경제사학계에선 압축 성장 과정에서 부정부패와 빈부 격차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는 이가 많다. 강 교수도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실 그래요. 영국이나 미국도 19세기 자본 축적 과정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심한 착취와 부패를 경험했거든요.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덜한 편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요."

강 교수는 유신 체제 아래 있던 1973년 서울대 법대에 들어갔다. 긴급조치로 친구들이 붙들려가고, 제대로 된 시위도 한번 벌이기 힘든 시절이었다. 강 교수도 운동권 친구에게 유인물을 찍는 등사기를 빌려줬다가 한밤중에 연행돼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이런 경험들이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꿔 1979년 미국 버클리대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됐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악연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박정희와 객관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고 있다. 책 말미엔 이런 ‘고백’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증오의 감정이 강했지만, 이를 떠나 1960~70년대 한국의 대내외적 상황을 ‘정치적 현실주의’의 관점에서 냉정히 고려하면서 그를 평가해야 한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박정희’보다 더 나은 정치적 대안이 가능했을 것인가를 자문했을 때 긍정적인 답변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연구를 거듭할수록 느끼게 된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 말해 이승만, 신익희, 조병옥, 윤보선, 장면과 같은 당대의 정치 지도자들이 박정희보다 더 나은 대안이었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는 답변이 잘 나오지 않았다.’

보수와 진보의 한계를 비판하며 ‘현실에 대한 학문적 거리 두기’에 힘써온 강 교수의 연구 역정을 지켜봤기에, 그의 말에 더 무게가 실렸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4년 8월 30일 at 12:23 오전

    아침 신문에서 저도 이 기사 읽었어요.
    공이 과에 묻혀버려선 안돼지요.   

  2. 지해범

    2014년 9월 1일 at 11:37 오전

    맞습니다. 공감합니다.
    최근 유관순 열사 사태를 봐도 우리 사회의 본질을 읽을 수 있지요.
    미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가 유관순 열사 같은 훌륭한 분을 두었으면 그분의 공적을 정확히 알리고 후손들이 본받도록 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사소한것까지 꺼집어 내어 잘했니 못했니 안으로 지지고볶느라고 정작 유관순 열사의 정신은 온데간데 없지요. 만약 유관순 열사가 다시 태어난다면 이런 나라, 이런 국민들을 보고 자기를 희생하고 싶을까요?
    그리고 지금 유관순을 비판하는 사람들, 자기가 그 시대에 태어나면 유관순 처럼 나라를 위해 앞장설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소위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국가관과 가치관이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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