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하면서 이런 심경을 토로하는 분이 있다. 강아지·고양이도 아닌 생명 없는 물건(an inanimate object)을 팔면서 마치 정든 생명체 떠나보내듯(send a beloved animate one) 애석해한다.
헌신짝 버리듯 한다는(dump like an old shoe) 말이 있지만, 오랫동안 나를 업고 다니다(carry me on their backs) 닳아버린 신발을 내다버리는 데 죄책감을 느끼지(sense a pang of guilt for throwing away a pair of worn-out shoes) 않는 나는 왠지 낯설다.
그에 따르면 갓난아기는 생물을 무생물로부터 구분하기 시작, 생후 9개월쯤 되면 운동신호로 둘 사이를 구별할(distinguish between the two based on motion cues)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세 살 때까지도 인형과 로봇에 두뇌가 없다는(do not contain a brain)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과정에서 생후 최초의 사랑 대상인 엄마로부터 감정적으로 분리되는 잠자리에서 곰인형이나 담요에 엄마와의 유대감을 옮겨 실어(transfer his or her maternal bond onto a favorite teddy bear or blanket) 그 불안감을 진정시킨다(ease the anxiety).
성인이 된 후에도 비슷한 맥락에서(in a similar vein) 물건에 감정을 불어넣는 성향(a propensity to infuse objects with feelings)을 간직하게 된다. 한 예로 일본에는 ‘하리쿠요(針供養)’라는 것이 있다. 부러진 바늘을 모아뒀다가 제사를 지내주는(hold a memorial service) 행사다.
장난감 가게의 어느 직원은 손님이 봉제완구(a soft toy)를 사갈 때 반드시 머리가 봉투 밖으로 나오게(leave its head sticking out of the bag) 포장한다. "혹여 숨 막힐까 봐."
생명 없는 존재에도 그런 사랑을 베풀줄(set their affections on inanimate beings)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의 사랑이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