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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construct()
를 사용해주세요. in /webstore/pub/reportblog/htdocs/wp-includes/functions.php on line 3620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을까 - 윤희영 기자의 뉴스 잉글리시(News English)
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을까
6일과 9일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70년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사실은 일왕 왕궁(emperor’s palace)이나 교토(京都)에 투하됐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고(surrender to the Allied powers) 사흘 뒤인 1945년 5월 10일, 미국 로스알라모스에선 엄선된(be carefully selected) 과학자들과 군 고위 인사들이 비밀 회동을 가졌다. 이름하여 ‘표적 위원회(Target Committee)’. 전대미문의 원자폭탄 파괴력을 과시하는 데 일본 어느 도시가 가장 효과적일까 밀담하는 자리였다.

미국은 1944년 후반부터 일본 내 목표물에 대해 심사숙고했었다(ruminate on targets). 일본인들이 감성적 가치를 갖고 있어(possess sentimental value) 전쟁 의지를 꺾어버릴 수 있는 도시, 군수 공장, 병력 집결(munitions factories and troop concentrations) 등 군사적 의미가 있는 곳, 원폭의 가공할 파괴력을 과시하는 데(demonstrate the awesome destructive power of an atomic bomb) 충분한 크기의 도시를 물색했다.


윤희영의 News English 일러스트
일왕 왕궁을 목표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대부분 공감했지만, 일부에서 반론을 제기했다(set forth a counterargument). 도쿄는 이미 폐허가 된(fall into ruin) 상태여서 원폭 위력을 전 세계에 보여주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명단에서 제외됐다(be struck from the list).

그다음으로 일본 문화와 지성의 중심이자 옛 수도였던 교토가 꼽혔다. 인구 100여만명의 산업도시여서 기준 대부분을 충족하는(meet most of the criteria) 목표물이었다. 그러나 1926년 교토로 신혼여행을 갔던 헨리 스팀슨 당시 미 국방장관이 ‘구명운동’을 벌여(campaign to save its life) 최종 순간 제외됐다. 그다음으로 꼽힌 곳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였다. 히로시마는 주요 육군보급창이자 군항(army depot and naval port)인 데다 산과 구릉으로 둘러싸여 원폭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지역적 특성을 갖고 있었다. 나가사키는 언덕이 많아(be hilly) 적합한 곳은 아니었지만 대형 전함을 건조하는 미쓰비시조선소가 있어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규슈 북부 고쿠라(小倉)는 군용 차량, 군수품, 함포 등으로 가득한(be replete with military vehicles, ordnance, naval guns) 곳인 데다 독가스(poison gas) 생산설까지 퍼져 있어 타깃으로 꼽혔다. 이렇게 해서 1945년 7월 25일 최종 대상은 히로시마, 고쿠라, 니가타(新潟), 나가사키로 좁혀졌다. 처음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다. 4개 도시 중 8월 3일 이후 육안으로 보이는 기상 상태가 되는 곳부터 원폭을 투하하라는 명령이 하달됐고, 6일과 9일 맑은 날씨를 보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순으로 작전이 단행됐던 것이다.

스팀슨 장관은 며칠 앞서 이런 말을 남겼다. “원자폭탄은 단순히 새 무기가 아니다. 인류의 우주에 대한 관계에 있어 혁명적 변화(a revolutionary change in the relations of man to the universe)이다. 문명의 파멸(the doom of civilization) 또는 우리 모두를 잡아먹을 ‘프랑켄슈타인’이 될 수도 있고, 세계 평화를 지켜주는 존재가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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