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최고령 생존자(the oldest Holocaust survivor) 알리스 헤르츠-좀머씨가 110세로 별세했다(depart this life). 그녀가 성인 15만6천명 중 11%, 어린이 1만5천명 중 0.67%만이 살아남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어린 아들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을(survive to the last) 수 있었던 것도 피아노 덕분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병든 어머니를 억지로 떼어내(tear her diseased mother from her) 강제수용소로 보내버렸다(send her to a concentration camp). 오래지 않아(not long afterwards) 그녀와 남편, 아들도 다른 수용소에 감금됐다(be held in custody). 소름끼치는 악몽(an unearthly nightmare)의 시작이었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됐다. 히틀러는 수용소가 자유스럽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음악회를 열게 했는데, 거기에 강제 동원됐다(be coerced into it). 그 사이에도 수용소에선 매일 수백명씩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어나갔다(die each day from disease and malnutrition). 시체가 무더기로 쌓였다(be heaped up).
가장 두려운 건 강제이송 명단에 오르는(appear on a deportation list) 것.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 집단처형장 가스실로 보내졌다(be sent to the gas chamber of Auschwitz death camp). 그녀와 남편, 어린 아들도 언제 그 명단에 포함될지 몰랐다.
"당신의 연주회를 빼놓지 않고 들었소(never miss your concert). 내 어머니도 피아니스트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 당신을 찾아왔소. 두려워하지 말아요. 당신과 당신의 어린 아들은 가스실 이송 명단에 절대 넣지 않게 하겠소."
그러나 남편은 얼마 후 명단에 올랐다. 1945년 5월 러시아군이 진주해 해방된 후에야 남편이 굶주림과 발진티푸스로 숨졌다는(die from starvation and typhus) 소식을 전해들었다. 엄마와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졌던(barely escape death) 아들은 후에 세계적인 첼로 연주자 겸 교수가 됐지만, 결국엔 그 아들도 앞세우는 슬픔을 겪었다.
숨질 때까지 늘 피아노 곁에 놓아둔 것이 있었다. 종전 후 수용소 동료 생존자가 수소문 끝에(after asking all around) 찾아와 전해주고 간 죽은 남편의 닳고 닳은 양철 숟가락(a battered tin spoon)이었다.
☞ http://www.theguardian.com/world/2014/feb/23/alice-herz-sommer-holocaust-survivor-dies
관조자/觀照者
2014년 4월 3일 at 7:41 오후
잘 읽었습니다.
dhleemd
2014년 4월 4일 at 10:16 오전
그것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2014년 4월 9일 at 10:06 오전
눈물 납니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