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
로런 그로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한때 유행했던 히피족이란 말-
자유분방하고 자신들의 의지에 따른 삶을 추구하던 그들의 이야기는 노래나 사회성 짙은 분위기 속에 그들의 삶을 보는 느낌이 종종 색다르게 받아들여질 때가 있다.
여기 아주 작고 작은 아이가 있다.
이름도 그에 맞는 비트라고 불린다.
1960년대 미국 뉴욕 주, 자신들을 부르는 히피들이 모여서 만든 공유하는 삶 자체를 만든 사람들의 정착지는 아르카디아다.
처음 제목을 대했을 때는 차의 이름이 생각나기도 했었던, 낯설지 않은 명칭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에서 보이는 비트의 인생을 통해 유토피아적인 삶, 삶을 통한 다양한 모습들을 보는 느낌이 문체적으로 산문적인 느낌을 받게 한다.
아르카디아에서 처음으로 태어난 비트는 여러 삶의 형태를 지니고 몰려든 사람들과의 생활을 통해 성장해 나간다.
바깥세상과는 단절된 오로지 그들의 삶 속에서 서로의 공동 소유로써 살아가는 삶 속에 자라면서 첫사랑을 느끼는 과정, 그 사랑과의 이별과 아르카디아에 무분별하게 몰려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다른 문제가 발생되고 결국 아르카디아는 해체되는 아픔을 본다.
책은 총 4장에 걸쳐 비트의 생을 보인다.
뿔뿔이 흩어져 다른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들, 이 속엔 비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자라면서 성인이 된 비트는 사진학과 교수로서 다시 만난 첫사랑 헬레와의 사이에 딸 그레테가 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헬레가 어느 날 산책 길에 다시는 돌아오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찾고 기다리는 시간의 흐름, 그런 와중에 부모의 병과 사망을 통해 다시 찾은 아르카디아와의 재회는 이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받는다.
인생 고해란 말이 있듯이 살다 보면 기쁨도 있지만 예기치 못한 아픔도 있고, 슬픔, 괴로움,… 모든 감정을 수반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말처럼 영원할 것 같았던 아르카디아란 곳의 유토피아를 이루려 했던 사람들의 해체 과정은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결국 자연의 순리와 더불어 또 하나의 상실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과연 아르카디아 건설에 참여했던 그 모든 노력들이 헛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는 구절들, 비트가 아르카디아를 떠나며 새로운 바깥세상에 합류하며 살아갔지만 결국 아르카디아에 돌아오면서 유년 시절의 그 모든 일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감정들은 저자의 글 하나하나에 모두 들어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이곳이 진정 아르카디아란 생각을 들게 한다.
책은 운명과 분노와는 또 다른 분위기, 잔잔함 그 자체다.
어떤 커다란 획일적인 사건도 없고 그저 그런 하루하루를 열심히 노동과 노력을 통해 자신들이 원했던 공동체 안에 살아가려 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헤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이 경조사를 통한 것이란 사실들은 아르카디아란 상상 속의 장소가 마치 현재 어떤 곳에 실제적으로 있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묘사가 인상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비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인생 모두를 통틀어 아르카디아는 그에게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영원의 안식처이자 또 다른 인생의 참 맛을 느끼게 해 주는 장소란 생각이 든다.
***** 이제 그는 아주 분명하게 깨닫는다. 시간이 아주 유연하다는 걸, 고무줄 같은 것이라는 걸. 시간은 길게 늘어날 수도 있고 단단히 뭉쳐질 수도 있고, 매듭이 지어지고 접힐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는 내내 시간은 끝없이 순환하는 고리다. 밤이 있을 거고, 그러고 나면 낮이 있을 거고, 그러고 나면 다시 밤이 있을 것이다. 한 해가 끝나면 다른 해가 시작될 것이고, 또 끝날 것이다. 노인은 죽고, 아기는 태어난다. ㅡ p 116
누구나 유년의 시절을 관통하는 기억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그 기억만큼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듯이 비트의 삶을 통해 저자가 보여준 유토피아의 성공적인 결실이 아닌 그 유토피아 자체를 이루려 노력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란 생각을 해 본다.
그런 만큼 비록 실패는 했더라도 삶의 긴 연장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르카디아는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있겠단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