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안데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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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대륙의 서부를 종단하면서 북으로는 카리브해까지, 남쪽으로는 남극 바다와 닿아있는 안데스산맥. 안데스 음악은 이 고원의 척박한 땅에 문명을 일구었던 인디오들의 음악이다.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등이 안데스 국가에 속한다.
한 나라나 민족, 지역, 또는 하나의 문화가 지켜온 음악 전통이 담겨 있는 월드 뮤직의 대부분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그 정서적 특징이 만들어진다. 특히 다른 문화에게 정복당한 역사를 경험한 지역의 음악은 그 ‘한(恨)의 정서’로 인해 음악적 감동의 골은 더욱 깊어진다. 신대륙 발견의 선봉에 섰던 스페인에 찬란했던 잉카 문명을 정복당하고 고난의 역사를 살아야만 했던 인디오들의 슬픔이 짙게 배어있는 안데스 음악 역시 그중의 하나로 세계 음악팬들에게 감동을 전해왔다. (네이버에서 발췌함)

— 황매산 철쭉 축제장에서 —

일본의 교통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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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 지하철역 주변이나 번화가에 지정된 자전거 거치소가 있어 시내에서는 자전거를 많이 이용한다.
2> 경차에 혜택을 많이 주어 노란 번호판의 소형차를 많이 선호한다.
3> 대중교통 이용으로 평일 오전 10시인데 한산한 오사카 도심 도로,
4>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도 많이 이용했다는 인력거.

우리나라는 근래에 미세먼지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미세먼지에서 해방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일본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나라도 정부나 국민 모두의 노력으로 개선하였으면 하는 바람으로 올립니다.

교토의 노노미야 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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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神社)’는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까지 일본이 국교로 내세운 신도(神道)의 사당이다.즉, 신도의 신을 제사 지내는 곳이 ‘신사’다.

‘신도(神道)’는 일본의 고유 민족신앙으로, 선조나 자연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다. 하지만 종교라기보다는 조상의 유풍을 따라 가미(神:신앙의 대상)를 받들어 모시는 국민 신앙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을 기초로 하여 전개되는 문화현상을 포함해서 말할 수도 있다.

현재 일본에 산재한 신사는 전설의 인물 또는 신격화된 실존 인물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 있고 누구를 내세우는지 불분명한 곳도 있다.일본 곳곳에는 8만여 개의 신사가 있다.

■ 야스쿠니 신사

일본 총리의 참배로 늘 논란을 일으키는 ‘야스쿠니 신사’는 1868년 유신에 성공한 일왕 메이지(明治)가 도쿠가와(德川)막부와의 전투에서 숨진 3500여명을 추모하기 위해 다음해 왕궁 옆 99000m2의 부지에 만든 호국신사이다. 1978년 도조 히테키 전 총리등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합사(合祀)되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총리나 각료의 공식참배 여부가 주목받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거부하는 외교적 마찰의 대표적 신사)

■ 메이지신궁

메이지신궁은 메이지 왕을 신으로 받들고 있는 곳. 과거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 등 일부 외국원수들이 이곳을 참배했으며 2002년 2월18일 일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메이지 신궁을 참배해 논란이 되었다.

지난 75년에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추진했다가 외교 문제등을 고려해 포기, 그 대신 메이지 신궁을 방문했었다.

일본의 신사 (시사상식사전에서 발췌함)

오사카 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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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주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오사카의 상징인 오사카 성은 16세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일본 통일을 달성한 후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지은 성으로 10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1583년에 축성을 시작했다. 완성 당시 금박 장식으로 뒤덮인 호화로운 모습이었으나 이후 소실과 재건의 역사를 거쳤으며 지금의 건물은 1931년에 콘크리트로 복원된 것인데 병풍에 그려진 그림을 참고한 것이라고 한다.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가 사망한 후인 1615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공격으로 소실되었다. 1620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을 재건했으나 이전의 성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벼락을 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1931년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지만, 성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모습과 건립 당시의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사진 1) 정문
사진 2) 돌 하나의 무게가 130톤(돌은 200Km를 다시마 위의 굴림목으로 운반했다 함)
사진 3~5) 천수각
사진 6) 城內 해자
사진7~8) 城外 해자

*해자 : 방어용으로 성 주위에 둘러 판 못.

쌀밥처럼 흰 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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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비단옷을 입으며 고래 등 같은 기와집에 사는 것이 소원이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조 시대에는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흰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이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꽃의 여러 가지 특징이 이밥, 즉 쌀밥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꽃이 피는 시기가 대체로 음력 24절기 중 입하(立夏) 전후이므로,
입하 때 핀다는 의미로 ‘입하 나무’로 불리다가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북 일부 지방에서는 ‘입하목’으로도 불린다니, 발음상으로 본다면 더 신빙성이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