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가왕실의고문두명을창밖으로내어던진곳입니다.’30년전쟁’의도화선이된사건이지요."
가이드가프라하구왕궁의블라디슬라프홀창문을가리킨다.
"30년전쟁?그거종교전쟁아닌가요?신교와구교간의전쟁…"
보헤미아.그슬픈역사의현장앞에와있었다.
"프라하의연인"만을그리며빨간지붕사이의골목길을누비기에는가슴이그리가볍지만은않다.
서로상대방을이길자신이없을때에만유지될수있는것이’휴전협정’이라고누군가말했다.
16세기,
지루한독일내의신.구교간의종교전쟁끝에체결된아우그스부르크화의는
각영주들에게자기영지내의종교를자기마음대로결정할수있는권리를주었는데,주민들은달랐다.
주민들은영주가지정하는종교와자기들의종교가다르면거기서살지못하고이주할수밖에없었다.
일견,종교선택의자유가모두에게주어진것같이보이지만그선택권은영주들에게만있었던것이다.
그러니까,
이아우그스부르크화의는싸움에지친영주들과왕국간의일종의휴전협정과같았다.
주민들이획득해야할"신앙의자유"라는전쟁의불씨는아직도그속에남겨둔채…
1618년,당시합스부르크왕가의영토였던보헤미아(체코)의국왕페르디난드는열렬한카톨릭신자였다.
그러나주민의과반수이상이보헤미아의기독교개혁자인후스(Huss)를따르던후스파와개혁프로테스탄트였다.
따라서주민들의청원을귀담아듣지않는국왕에대해불만이많았다.
어느날,
분노한주민이왕의고문들을창밖으로내던져버렸다.
"프라하의투척사건"이라고일컬어지는이사건은프라하의폭동을일으켰고,"30년전쟁"의도화선이되었다.
이"30년전쟁"은,
20세기이전에일어난전쟁중가장처참했던유럽전쟁으로일컬어진다.
이전쟁이계속되는동안보헤미아의인구는1/5로감소되고말았다.
각국의정치적이해관계가걸린이30년전쟁은모든유럽을지치게했다.
1648년,드디어웨스트팔리아조약이조인되며유럽은이지겨운전쟁의막을내리게되는데,
이조약이체결됨으로서주민들은카톨릭이던,루터파던,개혁파던자기가원하는신앙을마음대로선택할수있게되었다.
그러나,
이처참한종교전쟁을겪은후사람들이깨달은것이란,
무력으로는아무것도해결할수없다는사실이었다.교리의확신도,유럽통합왕국의꿈도…
그래서인가,
지금은체코인구중무교(無敎)가약40%,로마카톨릭신자도이와비슷한숫자이지만교회출석률은대단히낮다고한다.
이후250년동안보헤미아는항가리-오스트리아왕국이해체될때까지합스부르크왕가의지배하에있게된다.
1918년1차대전후,
체코는겨우독립하는가했더니다시나치의지배하에놓이게되었다.
이동안체코의유대인은거의다몰살되었다고한다.
2차세계대전이끝나면서체코는소련의위성국이되었고,
그체제속에서도민주주의를갈망하던시민들의요구에부응해1968년공산당지도자알렉산더두브체크는
자유화개혁조치를단행하는데,이것이우리가흔히일컫는"프라하의봄"이다.
그러나몇달후소련이군대를몰고진군해오면서이봄은무산되고만다.
바츨라프광장의기마상아래에는공산주의체제에희생된사람들의추모제단이있다.
그후,1989년반공산주의저항운동가하벨은시민포럼을이끌고공산독재체제를퇴출시키고
구소련공산주의연방이와해된몇년뒤인1993년1월1일,
체코슬로바키아는체코와슬로바키아로나뉜다.
두나라가평화롭게갈라졌기때문에"무혈분리"라고도한다.
체코는새공화국의수도를프라하로정하게되었다.
성비트성당(St.VitusCathedral)앞이었다.
"왜입장료가없나요?"
"아직이성당의소유권결정이안났답니다.카톨릭것인지,개신교것인지…"
15세기에짓기시작해서20세기에야완성된성당.
재산권을놓고아직도신구교가다투는덕분에우리는공짜구경을했다.
"그럼건물관리는누가하나요?"
"하나님이하시겠지요."
교회안에는각양각생의스테인드글라스가그려져있었다.
다른유명한성당의것처럼통일성은없었지만다양성은있었다.
아르누보의대가알폰스무하(Mucha)의작품도거기있었다.
전통적인형식에서일탈한아름다움,아르누보.
어떤이는싸구려로보인다고도말하고,실용적인건축물이못된다고도말한다.
그러나,
아이스크림케익처럼부드럽고달콤해보이는아르누보양식의건물이즐비한프라하거리를지나며나는,
쓰라린전쟁과피지배자로서의역사적상처를
아르누보로감싸고치유하려는그들의마음을조금이나마이해해보려고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