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우리방에가기싫다,그냥여기서끼어잘까?"
밤12시까지아버지방에서공포영화를보고난후,여동생과나는그냥뭉기적거리고있었다.
보스턴,1997년.
친정아버지와여동생이안과학회에참석하러와있었다.
찰스강에서바라본보스턴야경
그때까지꼿꼿하게앉아계시던아버지께서,
"너희둘,나좀보자.내가오늘밤꼭얘기할것이있다."
동생과나는서로의아하게쳐다보았다.
무슨말씀을하시려는것일까?한국에있는식구들에게는말하기거북한무슨사정이있으신것일까?
"너희들방에가서얘기하자,경이(내딸)너는먼저자라."
내딸과한방을쓰시던아버지께서는우리방으로건너오셨다.
무슨중대발표를하시려고여태껏기다리고계셨던거야?
동생과나는비장한각오로아버지앞에앉았다.
우리아버지는술한잔드시기전에는대체로냉정한인상이다.그런데그날저녁은심각하기까지하셨다.
"나도…지금까지사는동안서양문물도여러번접해보았고,서양에티켓도배우고,너희들도알다시피
서양의학으로몇십년돈벌어먹고살고있다…"
혹시내일학회에가는것이부담이된다는말씀이신가?
그럴수도있지…영어로하는학회이니까…
"아버지,그럼내일아침에가셔서등록하시고,사람들과인사만나누시고,언니와시내구경가세요."
동생이성급하게나섰다.
"그얘기가아니다.나이가들면말이다,생각이많아지는법이다…"
나는아버지께서무슨유언비슷한것을미리하시려나싶어서가슴이뛰기시작했다.
"무슨말씀하시려구요?"
"오늘아침에말이다,식당에내려갔을때네가날더러나이프를쓰지말라고했었지?"
"네.브렉훠스트니까별로쓸일이없었지요."
머리에불이팍켜졌다.
베이컨,구다치즈팬케익
팬케익이있었다.
나는그것을덜어오고,아버지께서는그냥크로와쌍을가져오셨는데,아버지께서빵을나이프와포크로
잘라드시기에내가,
"아버지,팬케익잡수실때는나이프포크가필요하지만,보통빵잡수실때는그냥손으로뜯어잡수세요."
라고했던것이다.
엥?그것때문에?
"아버지,그것때문에화나셨어요?"
나는하마트면"삐치셨어요?"라고할뻔했다.
"아…꼭그것뿐이아니고,너희들이애비를골동품취급하면안된다!그런쓸데없는잔소리는할필요가없어.이애비도서양문물알만큼알고,너희보다훨씬먼저그사람들예의범절을배워왔다!"
아…우리아버지,
그래서하루종일불편한얼굴을하고다니셨구나…
홀홀단신월남해서자수성가하신우리아버지.
자신외에는믿을것이없다는것을평생교훈으로삼고사신우리아버지.
얼굴에는자존심,마음에는자격지심이공존하는우리아버지.
술한잔들어가면호인(好人),술열잔들어가면자신을볶아대는노인(怒人)이되시는우리아버지.
식구들에게는황금을보기를돌같이하라고가르치시면서도,다른사람은잘도와주시던우리아버지.
아침식탁의그작은매너가자존심을건드렸구나…
"아버지그래서속상하셨어요?앞으로는조심할게요."
"너는네남편에게도잘그러던데,조심해라,그러면안된다."
"아이,경이아빠는좀가르쳐야해요.너무몰라서…"
"쯪쯪,또…"
우리는맥이빠져서침대로들어갔다.
"언니,아버지께서다른말씀하시려다가말으신것아닐까?정말너무심각하셨어,그렇지?"
"엄마가그러시는데,별것아닌것가지고저렇게잘삐치신데…어떤때는이유도모르고."
"그렇지만,너무심각하셨었잖아…정말그게다일까?"
비디오게임"DemonSouls"
그아버지께서,
10년넘게데리고있던조수로부터억,억,할만큼사기를당했다.
치매때문에당한사기이지만,그치매때문에분노도못느끼신다.
대신어머니께서두배로분노하시기에여간염려가되는것이아니다.
100억,1000억씩남의돈을먹어야신문에"도사"처럼버젖이나는세상이라서인지,
까짓,90노인네돈몇억먹은것은아무도나무라지않는세상이되어버렸다.
작은예의범절에도신경을곤두세우시던우리아버지,
평생아내에게구두쇠노릇을하며모은돈,
돌아가실때까지자식들에게아쉬운소리안하려고애쓰며모았던돈을,
젊은사기꾼에게몽땅날리고도이제는화내실줄도모른다.
세상도,법의심판도화를내기는커녕,치매가된우리아버지처럼너무너그럽다.
아버지를보며,
우리는눈물을흘리다가,사기꾼에게분노하다가,이제는법과사회정의라는것에쓰디쓴비웃음을던진다.
그사기꾼이3년도안되는형을받았다고했을때,
"야,우리도멕여주고재워주고연봉2억받는큰직장한번얻어볼까?"라며삐뚤어진농담을했었다.
비틀어진세상.
삐뚤어진양심을지금바로잡아주지않으면우리는,우리자식들은계속이렇게비틀어져가며살수밖에없다.
나는아버지가빼앗긴돈도아깝지만,
아버지의근검절약과정직한삶의결과가사기당한것이더아깝다.
우리의counselor(변호사)는어디에있는것일까?
우리의judge(재판장)은어디에있는것일까?
(사진은위키피디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