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엇에 녹는가?
거실에앉으면뒷산의분홍꽃이,
부엌에앉으면아랫동네의산들바람이불어올라오는데,
그래서나는컴퓨터를들고어디로갈까자리를못잡고왔다갔다한다.
랑랑이치는라흐마니노프콘체르트는이좋은날,나를또자지러지게하고있다.
이런감미로운것들은항상달콤한추억을불러오게마련이다.달콤한추억…
오늘은사실,
꽃이핀내집자랑을하려고컴퓨터앞에앉았는데,
오감이너무예민해져서먼옛날추억까지불러오고야단이다.
여자를황홀하게하는것.
그것은분홍꽃,산들산들부는봄바람,라흐마니노프의피아노콘체르트,해초초밥,그리고…
어떤청년의무심한제스쳐.
한쌍은애인이고,나와그남자는그냥친구따라도봉산간그들의친구였다.
등산을마치고내려와우리는무교동낙지집에서뒷풀이를하고있었다.
항상그러했듯이,나는마시는술잔숫자만큼지껄여대다가거의막차를놓칠뻔했다.
그남자는나를데려다준다고수유리행버스에올랐는데,길다란뒷자리에흔들거리며앉아
나는이렇게말했다.
"막차,이거아무나탈수있는거아니라구요."
뭔소린지…
그가나를자꾸자꾸들여다보는것같아서나는눈을감아버렸다.
"늦은시간에버스잘타요?이게아마막차같은데…"
"그럼요.막차는마지막술잔을받은사람만이탈수있는거라구요."
아,또뭔주정인지.
그가말했다.
"수유리까지는아직한참가야하지요?그리고나는흑석동으로가야하고…"
"흑석동?거기는한강다리로가야하는데…근데,왜이차를탔어요?"
계속눈을감은채로나는대꾸했다.
"그래서말인데요,내가곧내려야하거든요.돈암동에서…"
"아,잘가세요…"
흔들흔들하며작별의인사를했다.
"정말혼자갈수있어요?"
"혼자?"
눈을떳다.뭔소릴하는거야?혼자못갈까봐?그렇게쳐다봤다.
"자,그럼조심해서가고,내일6시에만나요.거기서."
그가갑자기내손을잡아당겨펴더니손바닥에무얼그렸다.
6시.리버티.
그리고는다시꼬옥오무려주었다.글자가새어나오지못하도록.
"내일여섯시리버티,잊지말아요."
오무린내손을몇번흔들어보더니그가내렸다.
나는다시눈을감은채로
그가버스에서내려길을건너,흑석동가는버스정거장으로뛰어가는모습을상상했다.
손바닥에는아직도그가쓴고물고물한글씨의감촉이남아있었고,
그래서
나는그달콤한메시지를손에꼬옥쥔채로막차의뒷좌석에서녹아내리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