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추석을 눈 앞에 두고 부모님 묘소엘 갔다가 시간이 좀 있어 어릴 적 내가 살았던 동네를 찾았었다.
6.25직후부터 결혼할 때까지 족히 20여 년간 살았던 동네라 눈 감고도 길을 찾을 만한데 이상하게도 전혀 못 보았던 길처럼 낯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골목길(내가 살았던 집은 골목 맨 안 쪽에 있었다)은 왜 그리 좁고 짧던지 너무나 왜소하게 보였다. 어릴 적에는 무척 넓고 길었었는데…
골목어귀에는 큰 도랑이 있어서 여름철 장대비가 내리면 황토빛 급류가 콸콸거리며 무섭게 흘러내렸는데 도랑 전체가 아예 복개가 되어 있었다. 그 도랑은 거의 옥봉성당 앞까지 뻗었는데 말끔히 복개가 된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도랑 앞 집 버드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를 본다고 뒷걸음을 치다가 2m 정도의 도랑에 떨어져 오른쪽 팔꿈치가 심하게 찢어지는 상처를 입기도 했었다.
도랑을 건너면 2m 정도 높이에 뚝이 있었고, 이 뚝은 남강 다리까지 이어져 우리는 이 뚝을 ‘섬뚝’이라고 불렀다.
이 뚝은 홍수로 남강물이 불더라도 시내가 침수되는 것을 막아주던 방파제였다. 그러나 이 뚝도 진양호가 조성된 60년대 후반 장대동 일대의 부추(진주 방언으로 ‘소풀’) 밭이 택지로 변하고 시외버스 주차장이 들어서면서 없어지고 말았다.
내가 살았던 골목을 나와 조금 올라오면 우물이 있었다. 50년대 후반까지 수돗물을 먹지 못했던 우리는 이우물 물을 길어 부엌의 큰 독에다가 저장하고 식수는 물론 세수나 목욕까지 했다. 빨래는 가까운 뒤벼리로 가서 했던 기억이 나고 그 날엔 어머니를 따라가서 남강물에 목욕까지 하곤했다.
초등학교 시절, 형제 중 맏이였던 나는 언제나 두레박을 들고 물을 길어야 했고 물통에 물이 차면 어머님이 이고 날랐다. 물을 긷다 실수로 두레박을 빠트리면 갈구리를 가져와 건져 올리곤 했다.
이 역사 깊은 우물도 이젠 용도 폐기 되었는지 우물에 두껑을 씌워놓고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해마다 음력 칠월이면 ‘샘이 친다’고 해서 하루종일 우물 청소를 했고, 그날 밤이면 우물가에서 음식을 차려 치성을 드리곤 했었다. 물맛이 참 좋아 더운 여름철이면 찬 우물 물을 길어와 식은 밥을 찬물에 말아 멸치젓갈을 반찬으로 맛있게 먹었다.
아버님은 여름철 이 우물 물에 간장을 풀어 마시며 땀을 삭히기도 했다.
동네 뒷산은 ‘보리당’이라고 불렀는데, 유독 꿀밤나무가 많아 ‘풍뎅이(우리는 ‘사또방게’라고 불렀다)’ 를 잡으러 다니기도 했다. 풍뎅이를 잡으면 발을 꺾고 머리를 뒤로 돌려 날개짓을 하면 선풍기처럼 얼굴에 갖다대곤 했다.
그러나 어쩌랴. 벌써 60여 년 전의 추억일뿐 내가 살던 동네는 흑백 필름에서 총천연색 필름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나의 때묻은 기억은 저만치 굴러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