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진주봉래초등학교(당시는국민학교였다)에입학한것이일곱살때인1952년이었다.
나는2월생(음력)이라한해먼저입학했고,내친구들은대개45년생닭띠였다.
그때는6.25사변직후라학교건물도군데군데파손되어있었고,비오는날이면교실에빗물이새어수업을제대로못할지경이었다.
나는요행히미술에소질이있어사생대회에나가상을받기도했고,학급환경정리를할때면열심히그림을그려장식을하기도했다.
당시진주에는중안,배영,금성초등학교가있었고,배건너에는천전초등학교가있었다.
또진주사범부속초등학교도있었다.
그러나봉래의라이벌은항상비슷한세력의중안이었고,우리가중안을보고"중중까까중"이라고놀리면중안은우리를"봉사(소경)"라고되받곤했다.
그때만해도점심을굶는애들이많아가끔도시락도난사고가일어나기도했다.
또신발을잃어버리는일도비일비재했다.당시는주로검정고무신을많이신고다녔고,흰고무신은고급에속했다.
간혹설이나추석에운동화를얻어신었는데,운동화밑바닥에잉크로이름을크게써서신고다녔다.
그래도깜쪽같이훔쳐가는통에신발을잃어버리고우는애들을자주볼수있었다.
참,꿈같은얘기다.
학교뒷산은비봉산飛鳳山이었다.운동장에서보면우람한느티나무한그루와아주특이한모양의나무한그루가나란히서있었다.
이상하게도학교에서소풍을가거나운동회를할라치면비가잘왔는데,아이들은누군가비봉산에서용이되려는뱀을죽여행삿날이면꼭비가온다고말하기도했다.
초등학교시절의잊을수없는기억으로는5,6학년때담임선생님께엄청나게맞았다는것이다.
담임은김중곤선생님이셨다.선생님은우리들에게책임점수를정해주고는그점수에미달되면몇점에한대씩회초리로종아리를때렸다.
또시험을거의매일치렀는데,시험이끝나면그야말로교실은곡소리가낭자했다.
우린그때맞으면서도선생님이니까당연히회초리를들어야되는걸로알았고,우린잘못했으니까맞아야되는걸로알았다.학부모중에자식때렸다고항의한사람은한사람도없었다.
그덕분에우리반에서20여명이진주중학교에무시험으로입학할수있었다.
요즘학생들의체벌을놓고말들이많다.나는적당한체벌은학생들의인격함양과실력향상을위해필요하다고주장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