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성 설창수 선생님

맹세코,진주의최고인물을꼽으라면당연히파성설창수선생님을들수있다.

선생은고향이창원이라진주사람은아니다.하지만가장진주를사랑한사람이었다.

혹자는시인중에전라도는미당이요,경상도는파성이란말을한다.그만큼그분의시는선이굵었고,모든사람들을품을줄아는대인이셨다.

선생은위암장지연선생이창간한경남일보를해방후’중창간’했고,4.19이후에는참의원도지내셨다.

너무올곧은분이어서공화당시절에는엄청난곤욕을치러셨고,시화전을열면서어려운시대를잘넘기셨다.

사모님도교편을잡았는데,많은고생을하셨단얘기를들었다.

파성선생이하신일가운데최고의사업은단연’개천예술제’를창설하신일이다.처음은’영남예술제’로시작했지만지금은개천예술제로바뀌었다.요즘시,군마다생겨난지역축제는파성선생이만든지역축제를본뜬것이라고해도틀림없다.그당시’예술’이란상상도못했을때선생은선견지명으로거룩한발자취를남긴것이었다.

선생의작품가운데훌륭한글이많겠지만나는’의랑논개비문’를꼽고싶다.

노산이은상선생에게의뢰했지만노산선생이진주사람파성에게쓰게하라며사양했다고한다.

도도하고격조높은비문은수많은사람들의가슴에우국충정을불어넣었으리라.

선생은과거국회의원선거에나와서’출마의변’을썼는데,한편의시였다.

안타까운것은둘째아들맹규가참총명하고좋은후배였는데,지리산등반중독초를실수로먹고죽은것이다.

파성선생은그아들을위해금쪽같은시를남기셨다.

훗날파성선생이성지정화사업으로살고계시던촉석루옆집을떠나진주농고가는길목남강가에’청수헌’이란집을짓고계실때뵙던게마지막이었다.

진주시에서파성선생을위한기념사업이라도해주면좋으련만-.

선생님,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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