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청홈페이지를보니’진주8경’이나와있다.
그중제3경이’뒤벼리’인데게재된사진을보니6차선고가도로의최근사진이라예전의풍경은쉽게찾아볼수없다.
첨단시대에옛것을고집할순없겠지만너무변해버린뒤벼리의모습을보면서내유년기의추억들이싹뚝잘려나간듯한아쉬운기분을떨쳐버릴수는없다.
어릴적살았던곳이옥봉남동이어서남강과가까왔다.
직선거리로100여미터에옥봉양조장이있었고,다시200여미터거리에청과시장이있었다.
청과시장에서왼쪽으로직진하면말티고개가나오고가다가오른쪽이선학재공동묘지로가는입구가된다.
지금의수정초등학교자리에화장장이있었고그주변밭에는상여(‘생이’라고불렀다)를넣어둔작은집들이있었다.
청과시장에서오른쪽으로직진하면뒤벼리입구가된다.
입구가기전오른쪽에갈분공장(고구마로전분을만든다고들었다)이있었다.그주변은전부배추나무,부추밭이었다.
옥봉동쪽뒤벼리입구엔집이몇채있었다.기억에남는것은오른쪽산등성이에있었던길다란기와집이다.
그집이가정집이었는지아니면술집이었는지알쏭달쏭하다.
왼쪽으로는선학재로오르는산길도있었다.
1950년대뒤벼리입구는빨래터였다.
초등학교시절어머니를따라와보면평일에도수십명의아낙네들이빨래통을이고와남강물에빨랫감을헹구고는빨래방망이를두드리는소리가가히장관이었다.
빨래터가되다보니안쪽벼랑밑에는빨래삶는가마솥을걸어놓고하루종일뜨거운김을뿜어냈다.
지금은상상하기조차어려운광경이다.
입구에서도동쪽으로200여미터가면술집이있었고불교계통에서운영하던고아원이있었다.
술집에선남강에서잡은피리,잉어등으로회나매운탕을팔았다.밤늦도록노랫가락과젓가락장단이이어지곤했다.
그곳에서조금더가면큰정자나무가도로보다5미터정도높이에있었다.
정자나무아래는피리회로잔술을파는아줌마가있었고,아저씨들이회를초고추장에찍어막걸리잔을들이키는모습은무척근사해보였다.
길아래남강변에서어린소년은대나무낚싯대로피리를낚기도했는데그손맛은짜릿하기그지없었다.
그정자나무옆에유명한흔들바위가있었다.
초등학교시절엔봄,가을거의도동모래사장으로소풍을갔었다.그흔들바위밑을지날때마다위험하게올라선바위를쳐다보며가슴을졸이기도했다.
사람들은그바위가떨어지면다시전쟁이일어난다고들했는데지금도그바위가있는지궁금하다.
도동쪽뒤벼리끝머리엔취수장이있었다.
그앞쪽남강은물이깊어항상짙은푸른빛을띠고있었다.
취수장못미처왼쪽은산길이있었고’여우골’이라고불러늘으시시한기분으로지나곤했다.
지금은6차선도로가되었지만50년대의뒤벼리는소달구지두대가겨우비켜갈정도의좁은길이었다.
당시는진양호댐이생기기전이라여름에장마라도지면길이물에잠겨지나다니기도위험했다.
그래서남강과도로를구분하기위해도로끝에긴돌을박아경계를만들기도했다.
그때도도히넘쳐흐르던황톳물은바다를방불케했다.
유유히흐르는남강과산등성이아래좁다란길로이어졌던뒤벼리-.
‘독골’사는농부들이소달구지나리어커를끌고장보러가던모습들.
촌로들이지게에곡식이나채소를지고,아낙네들이함지에과일이나채소를담아이웃들과도란도란이야기꽃을피우며걷던모습이지금도눈에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