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만에주피터음악회이야기를이어간다.
벌써50여년이지났지만지금생각해도당시의행위가참’동키오테’적이었다고생각한다.
아무도알아주지않고물질적인지원이없었던상황에서혼자몸으로때우며버텨왔으니까-.
물론주위에서뜻을같이하고격려해준동호인들은몇분있었지만큰힘이되지는못했다.
제3회감상회부터는당시도립병원앞에있었던동산예식장에서매주금요일에열게되었다.
그때진주시내에는예식장이한곳뿐이었다.(얼마후YMCA가는쪽에내고향예식장이생긴걸로기억한다.)
동산예식장은아담하게꾸며진단층으로좌석이200석정도되었다.
천신만고끝에지배인을찾아가서사용승인은받았지만한번사용료가만만치않았다.
또지배인이무척깐깐한분이어서사용료를깎아주거나하는아량은전혀베풀지않았고,감상회가끝난후사용료를즉시계산하지못하면LP디스크를담보로맡겨야할정도였다.
장소가예식장이다보니고교생들도많이올걸로기대하고홍보포스터를직접만들어진주고교나진주여고주변에붙였다.
포스터를옆구리에끼고풀통을든모습이라니-.
또시내대로의양복점이나레코드가게의쇼윈도에포스터를붙이려고허리를굽혀야만했다.
그때를생각하면어디서그런용기와배짱이나왔는지지금도이해가되질않는다.
그런수모는감상객들이나많이오면감수를하겠는데그것도아니었다.
금요일이되면해가떨어지기전에예식장에가서준비를해야만했다.
등사를했던순서지는아침부터교회에가서가리방을긁어만들었고,감상객들에게줄커피나쥬스는여자회원들이도와주었다.쥬스래야분말쥬스를냉수에타서주는정도였지만-.
시작시간1시간전부터준비음악을틀었다.
그때많이틀었던곡이만토바니오케스트라(당시는’악단’이라고했다)의오페라아리아편곡들이었다.
제일먼저나왔던곡이푸치니의잔니스키키중’사랑하는나의아버지’였다.
지금도그곡을들을때면예식장문앞에서사람들을하염없이기다리던초라한내모습이떠올라씁쓸한미소를머금치않을수없다.
그런바램에도감상객은항상30여명을밑돌았고,매주예식장에레코드를맡겨야만했다.
그렇지만어려운가운데도스스로찾아와찬조출연으로테너색스폰을불어준진주농고생도있었고,바이올린이나클라씩기타를연주해준동호인들도있었다.
그들로인해’아,진주에도음악에목말라하는애호가들도있구나’하는위로를얻기도했다.
그러나예식장사용료를감당하기어려워10여회를진행한후에는다시장소를다방으로옮겼다.
두번째다방은인근의삼성다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