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라천리길’이란오래된노래가있다.
이노래는내어릴때어른들이술이거나하면즐겨불렀던노래다.
그러나60년대이후이노래가자취를감추었다가요즘간간히고개를내민다.
진주를노래하는데이보다더직설적인노래는없는것같다.
남인수선생이노래한’내고향진주’도훌륭한노래이긴하나’진주라~’만큼은호소력이적다.
서울에서진주까지거리가400Km를약간넘다보니’천리’라는말은그먼거리를가장함축성있게표현했다고할수있다.
간혹처음본사람과인사하는자리에서고향이진주라고하면그들은한결같이"아이구,천리가넘는먼곳에서오셨군요"하고’진주=천리’를단박들춰낸다.
그만큼’진주라천리길’은우리국민들가슴속에깊이각인되어있는듯하다.
정말그랬다.
1964년도초대학입시로상경할때유일한교통수단은진주역에서저녁7시에출발하는기차였다.
진주-마산의경전선을거쳐삼랑진에서경부선으로갈아타면다음날새벽5시쯤서울역에떨어졌다.
장장10시간의상경길이었다.
그후1970년대초에경부고속도로가뚫리고구마고속도로가개통된후서울에서진주까지는6시간대로단축되었다.
그렇지만설,추석의귀향길은한마디로전쟁터였다.
보통10시간은기본이었고,시간을잘못맞춰고속도로가막힐때는거의20시간이소요된적도있었다.
그뿐인가.상경길이편할요량으로차례와묘소참배를벼락치기로끝내고점심도뜨는둥마는둥고속터미널로줄달음을치기도했다.
그리고또10여시간이넘는고난의상경길이었다.
요즘은엄청편해졌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가개통된후고속버스는휴게소를들리고도3시간30분이면어김없이도착한다.
승용차편으로간다면서울집에서진주까지3시간정도소요된다고들한다.
그러나요즘은그좋은길이있어도진주갈일이별로없다.
부모님을유택에모셨으니1년에한,두번이고작이다.
그렇게해마다몇차례씩전쟁을치르며귀향했건만길닦아놓으니갈일이없어진것이다.
"진주라천리길을내어이왔던고
촉석루의달빛만나무기둥을얼싸안고
아~타향살이심사를위로할줄모르누나
진주라천리길을내어이왔던고
남강가에외로이피리소리를들을적에
아~모래알을만지며옛노래를불러본다"
조명암작사,이면상작곡의이노래는이규남이노래했다.
이노래는1941년콜럼비아레코드에서나왔는데,이규남은충남연기태생이었다.
‘고달픈신세’,’낙동강칠백리’를부른이규남은해방후월북했고’진주라천리길’도’월북자의노래’란딱지를달고한동안방송금지곡신세가되었다.
1990년대이곡은딱지를떼고우리들속으로돌아왔다.
내고달팠던귀향길만큼이나애환의노래라고할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