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8월경기도김포로이사갈아들이입주하는집을둘러보러간다기에시간이있어동행했다.
정오무렵비가떨어지긴했으나집사람과함께당산역에서아들과만나김포한강신도시로향했다.
오래전에는일때문에뻔질나게찾은김포지만오랜만에가는길은너무달랐다.
아들은씩웃으며"아버지,김포가이젠섬이됐어요"한다.아라뱃길로김포초입은근사한다리가놓였고,양평동88도로에서한강신도시가있는장기지역까지그야말로논스톱이었다.
당산역에서장기지역까지30여분거리였다.
불과1년여전황무지와다름없었던한강신도시는아직도많은지역에서공사가진행되고있었지만완전히신도시로서의모습을갖추고있었다.
쭉쭉뻗은도로며우뚝솟은아파트들은서울의번화가와다를게없었다.
아들은아파트단지와붙은손녀가다닐초등학교와손자가다닐길건너중학교를가리킨다.또2년후초등학교건너편에들어설고등학교자리까지보여주며교육환경에만족해한다.
그런데이상하게도아들의흐뭇한모습을보며내머리속엔40년전의진주상평동신혼살이했던집이떠올랐다.
1972년결혼후신혼의꿈을일궜던곳은상평동단독주택의방두칸이었다.
진양교를건너당시진양군청을채못가시내버스에서내리면5분거리에그집이있었다.
인근에진주공고가있었고,넓은들판에는집이띄엄띄엄있었다.
진양호댐이완공된지얼마되지않아과거모래사장이었던상평동은집보다는대부분이밭이었다.집주위엔채소밭이많았던걸로기억한다.
그때상평동을비롯한상대동,하대동지역은동진주라고하여개발이시작되던때였다.
행정기관은진양군청,법원.검찰지청이있었고,교육청도그무렵이전했다.진주공고를비롯한삼현여고와동명고교도그무렵터를닦았을것이다.
내가살았던집뒤에는당시진주MBC모기자가살고있었다.업무가같았던그와나는서로기삿감을교환하기도했다.
당시본성동경남일보에다녔던나는가급적자전거를이용하여출퇴근했다.
코스는법원을지나대나무숲길,그리고남강을왼쪽에끼고뒤벼리를지나는환상적인길이었다.
겨울은칼바람으로고생했고여름은땡볕아래를달리다보니힘들었지만봄,가을은멋진여정이었다.
특히뒤벼리와법원사이의대나무숲길은그서늘하고향긋했던바람이지금도생각날정도였다.
상평동신혼살이집은1년만에봉래동으로옮겼지만지금도어쩌다귀향해서그지역을지나다보면40년전의옛추억이머리속을스쳐가곤한다.
또그곳은아들녀석이첫세상구경을한곳이기도하니까-.
창밖에선뇌성이울고빗소리가요란하지만고향생각으로잠시즐거웠던밤이기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