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탕에 얽힌 슬픈 사연

요즘은어떨지모르겠지만내가살았던5,60년대의진주시엔보신탕집이드물었다.

당시엔보신탕을’개장국’이라했는데,음식점이비교적많았던진주에보신탕집이귀했던건나름대로의이유가있었던것같다.

진주는예로부터불교도시였다.

비봉산밑의의곡사를비롯연화사,서장대밑의호국사등큰절이있었고,인근의합천에는우리나라삼보사찰중하나인법보사찰해인사가있다.

60년대까지진주엔해인사가세운해인고교(후에동명고교)와해인대학(후에경남대학교)이있었다.

뿐만아니라지척인하동에쌍계사가있고,고성옥천사,곤양다솔사,산청대원사등기라성같은사찰들이있다보니불교의세력이이만저만아니었다.

내가초,중학교다닐땐가정환경조사서의종교란엔무조건불교였다.

실제로어머님은장남인나를위해초파일이면빼놓지않고연화사에연등을달았었다.

이처럼불교가진주사회에영향력이크다보니보신탕집이잘될리없었다.

왜냐하면불교신자들은육식,특히보신탕을멀리하였기때문이다.

아버님은생선도좋아하고쇠고기,돼지고기를가리지않았지만개고기는절대로입에대지않으셨다.

한번은아버님친구분이일부러개고기를집에가져왔지만아무리권해도절대로입에대지않았다.

후에아버님이지나가는말로말씀하셨다.

"우리집이개고기를먹지않는건이유가있다.선대할아버님(내겐증조부님)이독실한불교신자였다.슬하에아들이셋있었는데,네할아버지가둘째였고밑에동생이있었다.선대할아버님은자식들에게절대로개고기를먹지말라고엄명을내렸는데네할아버지와그형님(큰할아버지)이동네친구들과어울려개고기를먹었단다.그후막내동생이이유없이병이들었고결국돌아가셨지.그이후로는우리집안에서절대로개고기를먹지않았단다."

또하나의아픈추억이내게있다.

내가초등학교2학년때집에기르던개가있었다.

이름이’메리’였는데(당시엔수컷은’도쿠’,암컷은’메리’였다),노란털의전형적인토종개였다.

학교에서돌아오면꼬리를치며반겼고언제나내뒤를따라다니며떨어지질않았다.

3년여가족처럼지냈는데,하루는학교에서돌아오니’메리’가보이질않았다.

느낌이이상해서어딜갔냐고물어도어머니는대답이없었고,’메리’를동네방네찾아다녀도모른채했다.

결국동네누군가가귀뜸해서’메리’가팔려간집엘뛰어갔더니이미마당엔솥이걸려있고,’메리’는해체되어빨래줄에걸려있었다.

그때의참담함이란-.

나는큰소리로’메리’를부르고울며그집대문을걷어차고골목을뛰쳐나왔다.

그래서인지나는지금까지개고기는입에대질않는다.

전에직장생활할때유독보신탕을좋아하는사람이있어그런자리에몇번갔지만거의우거지만먹고국물만먹었을따름이다.

더러는분위기에맞춰고기를몇점먹긴했지만전혀식성에맞질않았다.

그래서나는’문명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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