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1월,군복무를마친나는진주시립연암도서관에서새로운’월요음악회’를창립,도서관장K씨의배려로도서관이휴관하는매주월요일저녁에고전음악감상회를가졌다.
적당한직장을구해고향에정착할요량이었으나좁은바닥에서내가할수있는일자리는쉽게나타나지않았다.
시간을때울겸K관장을도와도서관을들락날락하다가요행히진주MBC황PD의요청으로그해12월부터매주일요일오후2~4시까지2시간에걸쳐’일요음악회’의해설을맡게되었다.
음악을전공했거나악기를연주해본적도없는내가해설을맡은것은순전히음악동호회의회장이라는명분때문이었다.
그러다가해가바뀌어71년부터는일감이늘어’홈퀴즈쇼’와또한프로,72년부터는’비봉산의메아리’라는사회풍자프로의원고를쓰는스크립터가되었다.요즘말로방송작가로데뷔한것이다.
‘홈퀴즈쇼’는매주일요일아침두사람을전화로연결하여문제를풀어나가는퀴즈프로였다.
반면’비봉산의메아리’는일요일을제외한매일아침사또와방자를등장시켜사회의모순이나문젯점을꼬집는풍자극이었다.
‘비봉산…’은5분간진행되었다.당시사또는여자아나운서가,방자는남자아나운서가나름대로서민들의가려운곳을긁어주는구실을했다.
이프로들은내가72년9월경남일보에입사한이후에도계속되었는데,요즘행태로’투잡’을한셈이다.
신문기자로근무하면서(처음6개월은열심히’돼지꼬리(교정)’만그렸다)양쪽일을해나간다는게쉽지않았다.
그렇지만방송국의원고료가신문사월급보다많았으니쉽게그만둘수도없었다.
어떻든신문사의배려로,공무원이되어상경한74년4월까지양쪽일을병행했지만지금생각해도참고단했던시절이었다.
그것도2백자원고지10매를매일써서방송국에넘겨야만했고,또그소재를구하기가쉽지않아자나깨나머리를굴리던지난날을생각하면지금도머리가띵~해온다.
여담한마디-.
매일같이’비봉산…’을통해진주시청을까면서시치미를떼고출입처인시청을들락거렸으니때로는미안한생각이들기도했다.
한번은보도자료를가지러문화공보실에들렀더니정모실장이나더러차를한잔하자는것이다.
정실장은내겐고교대선배였고여러모로도움을준고마운분이었다.
사무실소파에앉아커피를마시는데느닷없이"어이,박기자.혹시MBC’비봉산의메아리’를쓰는작자가누군지알아요?"하고묻는것이었다.
그러고는"도대체시청하고무슨불구대천지원순지매일같이시청을들고까니내가시장님보기도부끄럽고…거누가쓰는지말좀해주시오"하고통사정을하는것이었다.
나는’엇뜨거라’싶었지만시치미를떼고"실장님,MBC출입기자한테물어보면잘알것아닙니까?"하고오리발을냈다.
정실장은"에이,그사람들이그런거가르쳐주나"하고내게알아봐달라고통사정이었다.
알았다고말한후문을나서는내뒤통수가따가왔다.
그분도말은안했지만다알고있었으리라.
그렇다고봐줄수도없었다.
시정(市政)을까는게’비봉산…’의맛이었으니까.
아마정실장도그렇게이해했을것이다.
그러나지금생각하니젊은날의만용(蠻勇)이왠지부끄럽게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