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꽃을좋아하셨다.
내유년시절,6.25동란이끝나기도전인52년3월봉래다닐적에우리집은옥봉남동골목안에있었다.
집으로가는골목은50미터쯤되었다.
몇년전그골목을가봤는데별로깊지않은골목이었다.
그래도초등학교다닐때그골목은꽤나깊었다.
우리집엔조그만마당이있었다.
가운데는빨랫줄도있었고부엌쪽엔장독대도있었다.
감나무가두그루있었고,무화과나무도있었다.
감나무는우리형제들에게심심찮은먹거리를주었다.
봄이면’감똘개’라고감꽃이먹거리가되었다.
떫고별맛은없었지만우리는열심히주워먹었고,그걸로목걸이도만들어걸고다니기도했다.
그뿐인가.
7월쯤채영글지못한열매가떨어지면주워서소금물에담가익혀먹기도했다.
그맛은별로였지만우리형제들에겐그맛없는감이유일한간식이기도했다.
감물이들어옷을베리고(망가트리고)어머니에게엄청난벌을받기도했었다.
감물은안빠지니까-.
좁은마당에어머니는꽃밭을만들었다.
키다리국화며맨드라미,접시꽃,채송화가마당가득자태를드러냈다.
꽃밭가엔술병을꺼꾸로박아꽤멋을부리기도했다.
아-.씨를빼고풍선을만들어입안에서소리를내던’땡깔(진주말)’이란꽃도있었네.
할아버지는꽃밭이못마땅하여"야~야,꽃밭없애고상추라도심으면어떻겠냐?"고말씀하셨지만어머니는묵묵부답이셨다.
그러곤틈만나면호미로꽃밭을다듬으면서콧노래까지불렀다.
땀방울이줄줄흘러내리는얼굴을수건으로닦으면서불렀던노래는남인수의’진주라천리길’이었다.
지금도기억나는건’키다리’꽃이다.
국화처럼생겼지만여름에피었던그꽃은화려하지않지먼참고살던우리어머니같은꽃이었다.
그꽃은키다리란이름에걸맞게키가1미터이상된걸로기억된다.
맨드라미꽃잎은추석때’부꾸미(진주에선’우쭈지’라고했다)’만들때흰떡위에놓아색깔을자랑했다.
꽃밭가녁에줄줄이피어있던채송화가지금도눈에선명하다.
지금우리집은그때와똑같다.
집사람은꽃을좋아해서열심히키우건만나는별로도움이안된다.
간혹무거운화분은들어주지만-.
배란다의화분을볼때마다그옛날어머니의꽃밭이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