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논개

오는8월16일(음력6월29일)은419년전인1593년왜군의제2차진주성공격으로7만민관군이진주성함락과함께장렬한최후를맞이한날이다.

이날의기(義妓)논개는왜장게야무라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유인하여의암(義巖)에서안고남강에몸을던짐으로써후세에호국의충절을보여주었다.

그로부터칠갑자(七甲子)에이른오늘까지도논개에대한논의가분분하다.

논개의고향임을내세우는장수지역에선논개가경상우도병마절도사최경회의측실[副室]이라고주장한다.

반면순국의현장인진주지역향토사학자들은논개가관기(官妓)였다고반박한다.

이러다보니정작충절의고매한기백은뒷전으로밀리고지엽적인문제,논개의신분이쟁점으로떠올라별소득없는소모전을벌이고있는셈이다.

이것을보면서등소평의말이생각난다."검은고양이든흰고양이든쥐를잡는것이중요하다."

나는역사학자도아니고특히임진왜란에관해깊은연구를한적도없다.

다만,진주에서출생했던사람으로내고장의역사적사실을꼼꼼히챙겨보고싶은욕심밖에는없다.

그냥일개시민의입장에서-.

따라서의기논개의순국일을앞두고님의실상을따져보고싶을따름이다.

먼저,장수가논개의고향이라는이야기부터알아보자.

논개의성은주(朱)씨,본은신안이다.고향은전북장수군계내면대곡리(일명장계)로되어있다.

부친은주달문,모친은함양박씨로서부친주달문은양반가의선비로향리에서훈장노릇을했다.

논개는1574년에출생했다.즉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에태어났는데술(戌)은’개’여서’놓은개(낳은개)’라하여논개라는이름을지었다고한다.

14세가되던1587년부친주달문이죽자건달이었던숙부주달무가논개를토호인김풍헌의민며느리로팔아넘겼다.이사실을안모녀는외가인함양안의면봉정마을로피신했다.

이에김풍헌은장수현감최경회에게발고했고,모녀를심문한현감은무죄를판정했다.

갈곳없던논개는병약한최현감의부인을간병했고,논개의심성을높게산부인이죽으면서측실로맞을것을권유하여18세인1591년논개는최경회와인연을맺게되었다.

1593년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승진한최경회가제2차진주성전투에참여했다.논개는부군을도우다가진주성의함락으로부군이죽자원수를갚고자기생으로변신했다.그날촉석루에서열린왜군의승전잔치에기생으로참석,왜장을유인하여의암에서순국함으로써호국의충절을후세에남겼다.

이에대한반론을향토사학자김범수씨는2002년9월경남일보를통해남겼다.

먼저논개의출생과가족관계는1982년장수군이발간한’삼절의고향’에서나온것으로최경회에게는나주김씨,여흥민씨의두부인이있어논개를측실로삼을수없다고주장했다.당시첩을두었던많은벼슬아치들이징계를받았기때문이다.

다음으로’장수군지’에논개가선조24년(1591년)봄장수현감최경회의측실이되었다고기록했는데,최경회는담양부사재임중선조23년(1590년)12월모친상을당해부사직을사임하고화순본가에있었다.

또최경회가장수현감을지낸것은1577~1579년으로그때논개의나이는4~6세여서최경회와의측실운운은어불성설이라는것이다.

기록에왜군이진주성을함락시킨후촉석루에서전승축하연을했다는데,촉석루는성의함락때소실되어연회를열수없었다고한다.논개가함께투신한적장로쿠스케는임진년(1592년)7월함경도에서전사하여진주성전투에는참여하지도않았다고한다.

결정적인것은논개가진주사람이라는것이다.논개는경남진주시집현면신당리출신으로진주관아의기생이라는것이영조33년(1757년)간행된’여지도서’와순조32년(1832년)나온’진주목읍지’등에기록되어있다고한다.

자,그렇다면논개가장수사람이건진주사람이건,최경회의측실이건진주관아의기생이건간에중요한역사적사실에의문이생기는것이다.

촉석루가소실되었다면연회는다른장소에서얼마든지열수있지만왜장로쿠스케가한해전에죽어진주성전투에참가하지않았다면과연왜장은누구란말인가.

자료를보면여러왜장이거론되지만거의로쿠스케로확인되고있다.로쿠스케는임진년7월에함경도에서죽지않았다는것이다.

논개의충절이최초로기록된것은1620년유몽인이쓴’어우야담(於于野談)’이었다.

임란30여년후암행어사로지역을돌던유몽인은진주지역의소문을엮어논개의호국충절을기록했다.

논개가왜장을아고투신한바위를’의암’이라고부른것도이무렵부터다.

그후경종1년(1721년)경상우병사최진한이비변사에논개의충절에따른포상을건의했고,영조16년(1740년)경상우병사남덕하에의해논개의혼을기리는의기사(義妓祠)가세워졌다.

이때부터논개추모제가시행되었다.

최경회의행장기가수록된’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는논개가측실로기록되어있고,해주최씨세보에도논개는’의암부인신안주씨’로수록되어있다.

1748년우참찬권적이’태상시장록'(공적서)에논개를천첩(賤妾)으로기록하고있다.

논개가순국한바위에’義巖’을쓴이는임란시함경도의병장정문부장군의차남정대읍으로인조3년(1625년)이후쓰여졌다.

다산정약용도논개를추모하는’촉석루회고시(矗石樓懷古詩)"와’진주의기사기(晋州義妓祠記)’를지었다.

계사년(癸巳年,1593년)음력6월임진년진주성전투에서참패한왜군은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의특명으로진주성을유린하기위해12만대군을이끌고재침공했다.

이때7만에이르는민관군이장렬하게산화했고,논개는스무살앳된몸으로왜장을안고남강에투신하여호국의드높은기상을후세에남겼다.

중요한건그의신분과출생지가아니라조선의백성으로서나라를지키는장한의지와고결한기상을후세에보여주었다는데있다.

논개는결코가상의인물이거나신화가아니다.

‘남존여비’의조선시대에그의행적을무시했거나소홀히한남성들에의해그기록이다소부실했거나미비했을지라도그의호국정신과충절을결코지나쳐서는안된다.

그뜨거웠던정열과사랑은오늘날’진주의혼(魂)’으로길이후세들의가슴속에살아있을것이다.

수주변영로의시’논개’를다시한번되새겨본다.

거룩한분노는종교보다도깊고

불붙는정열은사랑보다도강하다

아!강낭콩보다도더푸른그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더붉은그마음흘러라

아리땁던그아미높게흔들리우며

그석류속같은입술죽음을입맞추었네

아!강낭콩보다도더푸른그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더붉은그마음흘러라

흐르는강물은길이길이푸르리니

그대의꽃다운혼어이아니붉으랴

아!강낭콩보도도더푸른그물결위에

양귀비꽃보다도더붉은그마음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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