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일흔에못미쳤지만벌써손자,손녀와외손녀둘을두고있다.
주위의친구들을봐도나는다복한편이다.
동년배의친구들은대개큰손자가아직유치원생이거나기껏해야초등학교저학년인데,내큰손자는중1이니얼마나행복한가.
자녀들을아직까지결혼시키지못해애쓰는친구들을보면미안한생각이들기도한다.
나는스물일곱에결혼해서이듬해아들을낳았고,5년후딸을낳았다.
지금도미안한것은자식을낳을때한번도아내곁을지켜주지못했다는것이다.
아들을낳을땐진주에서신문사엘다녔다.1월하순이었는데숙직근무중에회사로전화가왔었다.
이웃에사는처형이아내가산기가있으니빨리오라는것이었다.
허겁지겁달려가아내를차에태워계동에있던일신산부인과에입원시켰다.
어머니께병원으로와달라고부탁하곤아내를둔채출근해버렸다.
그날오전11시쯤처형이전화로아들의출산을알려주었다.
딸을낳을때도마찬가지였다.
그때가78년5월이었는데강원도정선으로출장가는날아침아내를적선동에있는산부인과에입원시키곤출장을떠났다.그날은장모님이계셨지만아내의곁을지키는대신출장을강행했다.
정선에서일을끝내고여관에와서병원으로전화를했더니딸을낳았다는것이다.
동행했던동료가그얘기를듣고다음날일찍상경하라고권하는통에그나마이튿날돌아올수있었다.
이처럼나는진주말로’인정머리가없는’애비였다.
간혹내가왜’인정없는’애비가되었을까하고생각해보곤한다.
그건아마도지역적인,또집안의관습때문이었을것으로생각된다.
고향진주는무척보수적이었고,남존여비(男尊女卑)의관습이심한지역이었다.
내어릴적엔남자들만밥상에서밥을먹었고,여자들은바닥에밥그릇을내려놓고식사를했다.
간혹남자가길을가는데여자가앞을지나가면"재수없다"고소리칠정도였다.
자식에대한부모의행동거지도예외가없었다.
어른들이보는데서애비가자식을안고얼렀다가는"본데(교양)가없다"고핀잔을들었다.
그러다보니애비는자식에게적극적인애정표현을못하고’까마귀활본듯’덤덤하게대했다.
이런걸어려서부터지켜보았으니나도갈데없는’진주식인정머리없는애비’가될수밖에-.
애들데리고놀러가거나외식하자고하면이런저런핑계대기에바빴다.
지금도아들이애들데리고어디로놀러간다고하면아내는내들으라는듯"자식좀보소.자식이애비보다훨씬낫다"고쫑알댄다.
그러면나도"그래,자식이당신소원풀었네"하고꼬리를내린다.
이젠자식들에게베풀지못한사랑을손주들에게쏟는걸로대신한다.
옛말에’내리사랑’이랬다더니,자식키울땐몰랐던사랑이손주들에겐절로우러난다.
크건작건한결같이깜찍하고사랑스럽다.
자식들에게빚진사랑을이제야갚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