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의 고향길을 다시 가다

소설가이문열은’그대다시는고향에가지못하리’에서이렇게말하고있다.

[누구든지고향에돌아갔을때,그걸대하면"아,드디어고향에돌아왔구나"싶은사물이하나씩은있기마련이다.그것은이십리밖에서도보이는고향의가장높은봉우리일수도있고,협곡의거친암벽또는동구밖노송老松일수도있다.그리워하던이들의무심한얼굴,지서뒤미류나무위의까치집이나솔잎때는연기의매캐한내음일수도.]

요즘은자주가지못하지만부모님이살아계셨던8,90년대는일년에몇차례씩고향을찾곤했다.

그때만해도대전-통영고속도로가개통되기전이라대전,대구를거쳐구마고속도로를타고가다가다시남해안고속도로를갈아타야만했다.

지금은진주시로편입되었지만당시진양군지수면이었던톨게이트를들어서면오른쪽으로그유명한지수초등학교가보인다.이학교는삼성을창업한이병철선생과LG를창업한구인회선생,효성을창업한조홍제선생이함께다녔던학교라고해서유명한곳이기도했다.

그학교를만나는고속도로의왼쪽에는푸른대나무밭이있었고,그대나무숲을보면아,마침내고향에돌아왔구나하는반가움을느꼈다.

내겐대나무숲이고향의상징이기도했다.어렸을적남강건너편의대나무숲을사시사철보며컸으므로….

이번고향방문길은짧게끝났다.

5월3일정오서울을출발,숙소를통영에잡았던연유로진주를지나연화산나들목을나왔다.인근E공원묘지에계시는부모님을참배하기위해서였다.

통영에서일박하고다음날인5월4일오전10시쯤진주로왔다.아들이연이틀의운전으로피곤했기에결혼식에참석하고곧장상경하기로일정을잡았다.

불과한시간가량의여유밖에없어촉석루와진주성지로가자는아들의제안을바꾸어지난날우리가살았던집들을둘러보기로했다.

먼저아내는신혼살림을차렸던상평동을가자고했다.

진주시청(과거의진양군청)건너편대로를들어섰다.40년전우리가첫보금자리를틀었고아들이태어났던집을찾아이골목,저골목을헤집었지만집과건물들이촘촘하게들어서서도저히찾을수가없었다.

한참을헤매다가포기하고뒤벼릿길로들어섰다.

옛날의꼬불꼬불,울퉁불퉁했던길은넓히고잘다듬어졌다.남강물은유유히흐르지만자연미는간곳없고깨끗하게변해전혀다른얼굴의뒤벼리를만나는기분이었다.

여름이면남강에서잡아올린피래미를회쳐서잔술을팔았던정자나무도출입이폐쇄되어있었다.

그기묘했던’흔들바위’도보이지않고….

남강길을지나내가20대중반까지살았던옥봉남동길목에들어섰다.

옛날의고무신공장은흔적도없이사라지고낯선정자하나가길가에서있었다.

여름이면누런흙탕물이무섭게흘러가던개천(진주말로’또랑’)은복개가되었고가끔씩내블로그를찾아오는미국앨러바마에사시는kyser님이사셨던집도형태를알아볼수없었다.

온동네주민들의식수원이었던우물도이미용도폐기되었고…..

내가옥봉성당성모유치원을50년도봄에마치고(6.25동란한달여전)6년동안열심히다녔던봉래초등학교까지의길은왜그리작고짧은지….

그때어린내겐한없이멀고넓은길이었지만지금다시그길을가보니말마따나’자빠지면코닿을만큼’짧은거리였다.또내가살았던집으로이어지는골목길도작고초라해보였다.

봉래초교앞을지나모교진주중,고교앞으로갔다.

로터리옆금성초교자리에는백화점이들어섰고과거진주MBC자리엔아파트가자리하고있었다.

80년대중반직장관계로잠시돌아와서살았던상봉아파트와대룡골지역도둘러봤다.당시만해도대룡골은썰렁했었는데,지금은주택들이꽉들어차있었다.

아들은2년여다녔던봉원초교까지차를몰았다.그곳도예전엔제법높은산중턱이었지만지금은밑에까지집들이들어서있었다.

진주도참많이변해있었다.

결혼식장인근에있는경남문화예술회관앞둔치에앉아바라보는뒤벼리는가히절경이었다.

그렇지만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돌아본고향진주는이제내겐좀낯설었다.

어릴적추억과애환이담겼던장소들은없어지거나변했고,예전의수더분하고정겨웠던모습은깔끔하고세련되게바뀌어있었다.예전의진주가돌아가신어머니같다면,지금의진주는젊고잘생긴새엄마와도같은느낌이다.

나의지나친감상적인표현일까.

그래도진주는변함없는내정다운고향이었다.

세상이아무리변해도푸르른비봉산은그대로있고,충절의혼이깃든남강물은유유히흐르고있었다.

남강을굽어보는의젓한자태의촉석루,오늘도신안들판을향해미소짓는서장대가있는한진주는내청춘의열정과꿈을키워준잊지못할고향이다.

언젠가돌아가서그품에안기고싶은고향진주.

오랜만의방문길은불과세시간여만에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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