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다른남남이부부로만나가정을이루고평생을살아가면서평탄하게살기란쉽지않다.
서로의개성이있고살아왔던습관이있다보니사사건건충돌하게되고말다툼이생기게된다.
때로는별일없이끝나기도하지만어떤때는며칠씩말을하지않을정도로심하게다투기도한다.
누가그랬던가.’부부싸움은칼로물베기’라고.물론흔적없이화해가이루어지기도하지만비극적인끝장을내리는부부싸움도많은게오늘날의현실이다.
신혼초부터우리부부가가장많이다툰건성격때문이었다.
실속파인아내에비해나는명분을중시했기에종종말다툼이일어났다.
예를들어어느집에인사를갔을때내가가게에서종합선물셋트(과자)를사오자아내의공격이시작되었다.
실속없는과자를왜사왔느냐,차라리설탕같은살림에보탬이되는선물이좋지않느냐,이런식이었다.
가끔은점수를딴답시고옷이나화장품같은선물을할라치면어김없이화살이날아왔다.
값이비싸다느니,물건이’태가안난다’느니,그래서한동안밖에서물건사는걸기피할수밖에없었다.
지금도기억속에남는부부싸움을벌인적이있었다.
40여년전일이라오랜기억속의일이지만,추운날씨탓이었던연고로요맘때쯤이면한번씩생각나곤한다.
1974년봄,지방신문사에서기자로생활했던나는별정직공무원으로발령받아상경했다.
근무처가세종로중앙청(지금은없어졌지만)4층이었다.모부처의정무관리실이었는데,실장(1급)과3급갑(당시)서기관두사람,그리고나,실장비서여직원1명과기사1명이구성원의전부였다.
실장은그후국회의원과장관을지냈고,내직속상관이었던C과장은김대중정부시절한은총재를지냈었다.
C과장과내가맡은일은수입자재의국산화대체작업이었다.쉽게말하면,정부기관이나국영기업체가외국에서자재를사올때그와같은자재가국산으로도가능한지,아닌지를판단해서불가능하다고우리부처가판정을내려야한국은행에서달러를바꾸어주는작업이었다.
당시만해도달러는엄청부족했고,달러를아끼기위해박정희대통령이특명으로내린지시사항이었다.우리는주로기술단체의협조를얻어판단을했고,가장많은수입자재를썼던기관이한국전력과포항제철(당시)이었다.
한번은문화공보부에서요청이있었는데,국립극장에서연습용피아노를일제야마하로사게해달라는것이었다.
과장은내게당신이음악을좋아하니꼭일제를써야하는지,국산삼익이나영창도가능한지알아보라는것이었다.
몇군데시장조사를하며알아보고있는데,문공부담당자가와서는연주자들이반드시야마하를사야된다며통사정이니우리나라음악발전을위해선처해달라고부탁했다.
나도그말에수긍이가서과장께말했더니그렇게하자고했다.국립극장에서야마하피아노를사게된것이었다.
그후문공부담당자는고맙다며가끔씩연주회티켓을보내왔다.
오래돼서기억이잘안나지만,연초인가국립극장에서차이코프스키’백조의호수’를공연한다며초대권을보내왔다.
꼭보고싶었던공연이라아내와함께가기로약속했다.그런데문제는세살된아들이었다.애기를데리고갈수없으니어디맡겨야하는데,궁리끝에같은동네사는처형댁에부탁을하기로했다.
당시나는화곡동에살고있었고,아침이면통근버스(관광버스)가와서실어다주었다.
퇴근은사당동에서화곡동까지가는89번시내버스를주로이용했다.버스정류장이사직공원못미쳐영화진흥공사(당시)앞에있었다.
연주회당일,퇴근후사직공원옆버스정류장에서만나기로했는데,30분이지나도사람이나타나지않았다.
요즘같으면휴대폰이있어제깍확인이되지만그때만해도전화가무척귀한시절이었다.
가까스로공중전화로처형댁에전화를걸어애기를맡기고언제쯤갔는지물었더니무슨소리냐고오히려반문을했다.애기를맡기지도않았다는것이었다.
그래서나는생각하기를날씨도춥고애기를맡기려니미안하기도해서안오려나보다고판단했다.
마침89번버스가오길래집으로왔다.
집에오니주인집(우리는단칸방을얻어살았다)아주머니가왜일찍들어왔느냐고반문을했다.
그러면서아들을주인집에맡기고나갔다며내게데리고왔다.잠시정신이멍~했다.
곰곰이생각해보니아내는애기를주인집에맡기고나간것이었다.그렇다면?
그로부터한시간정도지나추위와화로얼굴이새파래져돌아온아내는완전히나를외면했다.
길이막혀좀늦었을뿐인데,그새를못기다리고돌아왔다며나를공격했다.
그말도사흘쯤지나서한말이었다.그사흘동안우리부부는완전히’까마귀활본듯이’서로를외면하고살았다.
서로가아니고,나는몇번이고변명을늘어놓았지만아내가못들은척외면했던것이다.
‘백조의호수’가불러온부부싸움,그여파는지금생각해도무척아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