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가그때그여자를다시만난건삼십년도훌쩍넘어서였다.둘은스무살무렵잠시만났다가헤어졌었다.
그날사내는초등학교동창회총무가몇번씩이나전화를넣어꼭나와야된다며사정하는탓에마지못해동창회모임에나갔다.서울에도초등학교동기동창이삼십여명이나있어가끔모인다는얘기는들었지만이핑계저핑계로참석하지않았다.그시절보기싫었던친구가돈좀벌었다며거들먹거린다는소문을들었기때문이었다.
모임장소는강남의한정식집이었다.시간에맞춰갔더니여남은명이교자상에둘러앉아맥줏잔을돌리는중이었다.
환갑을몇년앞둔초로의남녀는마치옛날로돌아간듯서로의이름들을부르며투박한사투리로걸쭉한농담들을나누고있었다.사내가자리에앉기바쁘게집중적으로술잔이날아왔고술잔으로승부라도겨루는듯사내는열심히마시고돌렸다.
몇순배잔이돌자질문들이봇물처럼터져나왔다.사내들은이자식,전에좋은자리있었다고들었는데목이굳어동창들을물로보나하며비아냥을날렸다.여자들은좀살가운편이었다.아이구,전에는체구가쪼깬터니(작더니)운제그리몸이불었노,머리가허영기(하얀게)곱게늘겄네하며반가운체했다.
사내도술김에한마디했다.아이,가수나(계집애)들아.너거는복도만타.무신복이많은데?봐라,너거남편들한테대모(비하면)우리는영계축에드는기라,알겄나.너거는영계하고논다아이가.방안에는파안대소가터졌다.
사내가그여자를만난건삼십여분이지나서였다.열댓명이모여대충모인줄알았는데방문이열리며그여자가들어섰다.어서오이라,동창들의환호에방긋웃던그녀가사내와눈이마주치자당황한듯표정이바뀌었다.
그것도잠시,그여자는다시미소를머금었고사내도얼른고개를돌렸다.
앞에놓인맥줏잔을들이키는사내의눈망울속에그때그시절이주마등불빛처럼흘러갔다.
그가그녀를초등학교졸업후다시만난건고등학교를졸업했던그해봄이었다.어떤다방에서열렸던음악감상회에서둘은마주쳤다.초등학교시절한동네에서살았던둘은서로의안부를물었고둘다대학입시에실패해서재수생이란사실도알았다.
초등학교졸업후부산에서중,고교를나온그녀는고2때아버지가돌아가시는설움을당했었다.맏이였던그녀는어머니가두동생을데리고아버지가하던가게를꾸리느라고생하는걸알고고향으로돌아왔다고했다.
그녀가고전음악을좋아하고많은음반을가졌다며집으로놀러오라고했다.그날이후그는그녀의집을자주찾았다.
그때만해도오디오는덩치큰전축이대부분이었지만그녀는두껑을여닫는신식오디오를가지고있었다.
그가그녀의집에가면이층에있는그녀의방에서음악을듣곤했다.대개바흐나모차르트,베토벤의음악을자주들었는데그녀는차이코프스키를무척좋아했다.
그녀가타주는커피한잔을마시며’백조의호수’나’안단테칸타빌레’를들었다.트럼펫의팡파레가인상적이었던’이태리기상곡’은그에게새로운감동을안겨주었다.
감미로운음악에빠졌던꿈같은날들도그리오래가지못했다.
그녀의집에찾아간지석달쯤된초여름,그가집에들어서자그녀의어머니가불렀다.
총각,내하고이야기좀하까.예,말씀하이소.보래,총각.오해하지말고들어라이.예.
담부터는우리집에안왔시모좋겄다.와그라는데예.
총각도알다시피총각이나우리딸이나다큰총각,처니(처녀)아이가.다큰처니집에총각이들락거리모이우지서(이웃에서)머라쿠겄노.생각해바라.그랑께부탁한다이,알았제.
그날로끝이었다.그녀어머니의부탁대로그날이후그는발길을끊었다.
뒤늦게알게된그녀는괜찮다며인편으로다시놀러오라고했지만더이상찾아가지않았다.
아무리음악이좋지만눈치받으며듣고싶지않은그의작은자존심때문이었다.
그날이후그녀와의만남도다시는없었다.
동창회가파한건밤열시쯤이었다.친구들과헤어져버스를기다리고있는데누군가사내의어깨를툭쳤다.
돌아보니그여자가빙긋이웃으며서있었다.어,집에안가고?사내가묻자그여자는배시시웃었다.
그때는서운커로(섭섭하게)헤어졌는데뒷마무리는해야안되겄나.뒷마무리?
그래,그때우리엄마가좀심했제?심하긴,어른들이야늘안그렇나.이해한다.
그람됐다.그래,집에잘가라.손으로빠이빠이를하며그여자는돌아섰다.
그래,니는우찌사노.자식은몇이나두고.참,너거남편은머하는데.이런질문들이입안에서맴돌았지만사내는말을꺼내지못했다.
그때그여자는멀리작은점으로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