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배고픔의 기억을 아는가

국민학교3학년때였으니열살적의일이다.

그때내가다녔던학교는6.25동란의여파로건물이반파半破되어채복구가되지않았었다.비가오면교실은물난리가났고실내수업보다도날씨가좋으면운동장나무그늘아래서수업을할정도였다.

기억하건데,당시간혹오후까지수업이있어도시락을싸가곤했었다.점심시간이되면60여명중절반이상은도시락을싸오지못해물로고픈배를채우거나아니면운동장옆풀밭에앉아먼산바라기를하는애들도있었다.

나는할아버지께서농사를지었던탓에단무지나명태무침,멸치볶음을반찬으로도시락을싸갔었다.

그러다가어느날,운동장에서체육수업을마치고들어와보니내도시락이없어졌다.아무리찾아도,선생님께말씀드려교실을뒤졌지만도시락은나오지않았다.

그당시학교주변에사는어려운사람들이간혹빈교실에들어와책가방을뒤지거나도시락을가져갔다는말들이있었는데그들의소행이었던걸로짐작되었다.

그렇지만도시락을잃어버린나는어머니에게호된꾸중과종아리를맞았었다.

내가고등학생이었던60년대초까지만해도’춘궁기春窮期’란말이있었다.추수한쌀이떨어지는4월부터보리가나는6월초까지두달여동안민초들은힘겨운삶을살아야만했었다.보리가날때까지의고단한인생살이라고해서’보릿고개’라고말하기도했었다.

60년대초만해도종종신문에굶어죽었다는기사가나오곤했다.요즘은그런기사를볼수없지만복어알을먹고식중독으로죽었다는기사도심심찮게등장하곤했었다.

그만큼반세기전만해도우리는참으로고단한삶을살수밖에없었다.

내가유독국수를좋아하는데는나름의이유가있다.몇번글을올렸지만쌀이귀했을때대개의가정에선으례국수를삶거나수제비를해먹었다.그러다보니분식에저절로입맛이길들여지게된것이었다.

사변이후십여년간우리집에서도간혹옥봉성당에서배급해주는강냉이죽을먹었다.노란강냉이죽은차라리보리밥보다훨씬먹기가좋았다.

그후베트남등지에서수입된안남미安南米가식탁에올라왔다.쌀알갱이가길쭉하고밥을지어놓으면석유냄새가났지만그래도보리밥보다는그게더나았다.

그러다가통일벼가생산되었고그이후배고픔의아픈기억은점차사라져갔다.

내가공무원으로근무했던70년대중반만해도분식장려라고해서매주토요일은반드시점심을칼국수로먹어야만했다.구내식당에서도그날은밥을팔지않았다.

학교에서학생들은혼식을해야만했다.도시락검사를해서보리쌀을일정비율이상섞어야만했었다.

그와같은각고끝에마침내식량자급이이루어졌고쓰라렸던배고픔의역사는종지부를찍었던것이다.

생각나는추억꺼리가있다.

70년대중반이후정부는쌀의자급을위해쌀막걸리제조를금지시켰다.대신밀가루를쪄서막걸리를만들었다.

그조치가해제된것이78년11월로기억된다.그해11월모협동조합중앙회에근무했던나는기사취재를위해전북전주지역으로출장을갔다.’가는날이장날’이라고하필그날전주에서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가열려여관을구할수가없었다.마침다음날남원을방문하기로되어있어임실까지나가서여관에들었다.

다음날전주에서온도연합회직원과임실버스정류장에서만났다.

남원가는버스표를끊고기다리는데직원이누군가를만나반갑게인사하고는나를소개시켜주었다.그분은성당신부님이라고했다.

직원은내게신부님모시고한잔어떠냐고물었다.좋다고했더니신부님모시고근처식당에가서새로나온쌀막걸리한잔씩을나누었다.

지금에야흔한게쌀밥이고이것조차살찌고건강에안좋다고기피하는세상이되었다.

그렇지만불과50여년전만해도이걸먹지못해굶어죽은이들이있었으니그대는아는가.

각고의노력과결단으로우리국민모두를배고픔에서해방시킨지도자가있건만,그것을잊었는지혹은알고도그러는지배부른입으로그지도자를헐뜯는무리들도있나니,그대는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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