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밤잠을설치고있다.대개밤11시쯤잠자리에들지만두시간을넘기지못하고깬다.
한참뒤척이다겨우옅은잠이들거나그것도안되면서재에가서노트북을뒤적거리곤한다.
깊은잠을못자서일까.깨고나면별로기억에도없는이상한꿈들을자주꾼다.간혹돌아가신조부모님이나부모님이보이기도한다.혈육이상의정을나누었던고종사촌동생도종종보인다.
한밤중,꿈에서깨어나면불현듯고향도생각나고친지들의얼굴도떠오른다.신산辛酸의시절,찌들어살았던그시절의순간들이그리워지는건아마도가을탓일께다.
할아버지는1959년12월,내가중학교2학년때돌아가셨다.남강변선학재공동묘지에모시던그날칼바람은어린내가슴을더시리게했다.할아버지의영정사진을들고올랐던그산이얼마나멀었는지모른다.
할아버지는그해추석날몸져누우셨다.사라호태풍이왔던그날아침,갓을쓰시고두루마기차림의할아버지꼐서제사를모시다가대청마루에들이치는비바람을보며몇번이나탄식을했다.조상님오시는데저비바람이무슨짓이고.참으로고이하다.
탄식을하시던할아버지께서제사를마치고식사를하시다가갑자기수저를놓고축담아래로가셔서구토를하셨다.그러고는다시는그좋아하셨던술잔도몸소들지를못하셨다.그길로자리에누우신것이다.
병명은위암이었다.어머님은할아버지병수발에온갖정성을다하셨다.11월찬바람이불때할아버지께서그토록좋아하셨던대구를여남은짝[나무하꼬]사오셔서통대구,멜작을만드시고아가미젓이며알젓을담갔지만한숟갈도못뜨시고저세상으로가셨다.
할머니는내가군에서제대한다음해인1970년2월에돌아가셨다.
항상감사하게생각하는건독실한불교신자셨던할머니께서집안의장손인내가교회를나갈때순순히승락해주셨던것이다.우리집은대대로불교를믿었고사월초파일이면연화사에몇개의등을달았다.
물론장손이었던내이름의등도빠지지않았다.
내가고2때인1962년9월,친구의’협박’으로교회에첫발을내딛었고그날부터열렬한신자가되었다.
그래도일말의’양심’은있어서제삿날이면절을할요량으로젯상앞에섰다.그럴라치면할머니는절을못하게했다.예수쟁이가절을하면귀신들이도망을간다는거였다.
내가어른들의눈치를보며성경책을들고가만히나오면할머니는그래,바우야.교회는좋은곳이다.뭣이든지열심히해서많이배워라하며’격려’까지해주셨다.
내가아는선배한분은교회에다닌다고집안에서소작으로주었던땅까지빼앗아가는수난을겪으며고민하는것을보면서할머니께얼마나감사했는지모른다.
지금도할머니를생각하면기억나는일이있다.
1967년12월12일,창원훈련소에입소하기위해아침밥을일찍먹고버스를타기위해시내중심가에있었던대한금속차부로나갔다.당시부산가는버스를타면창원훈련소앞에내려주었다.
짐작컨대진주서창원까지세시간여걸렸던것같다.
동행해준사촌동생과집대문을나설때바우야~~하며슬프게우셨던할머니의울음소리가아직까지귓전을맴돈다.함께흐느끼던어머님의울음소리까지도.
그래,가을은그리움을불러오는계절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