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오에선페트릭쥬베(PatrickJuvet)의’슬픈로라(LaTristessedeLaura)’가잔잔하게흘러나왔다.

노인은앞에놓인술잔을입안에틀어넣었다.식도를타고내려가는알코올의짜릿한열기가이내가슴팍으로전달되었다.안주를집으려던손을거두고지긋이눈을감았다.가슴속을스멀스멀파고드는피아노의애절한선율에노인은순간아찔한현기증을느꼈다.노인의몸은축늘어지듯소파에파묻혔다.

그녀J가죽었다는소식을들은건오늘아침이었다.가끔씩친구들소식을전해주는재경초등학교동창회총무가휴대폰으로연락을해왔을때어쩐지불길한예감이스치듯지나갔다.지난추석때고향엘다녀왔노라며이것저것친구들소식을전하다가J가죽었다는소식을전했을때노인은망치로머리를맞은듯잠시멍~~해질수밖에없었다.친구가몇번여보세요,니듣고있나를반복해서야겨우정신을수습했다.친구는야,니갸하고무신일이라도있나하며조롱비슷한반문을했을때임마,정신나간소리하지마라하는궁색한답변이나왔다.이자슥,아물캐도이상한데.친구는연신혀를찼다.

그녀J.참으로오랜만에들어보는이름이다.그녀를처음만난게국민학교2학년때였으니여덟살코흘리개시절이었다.당시남녀가합반했던것이1,2학년까지였고3학년부터는남녀를구분해서반이편성되었다.2학년때새롭게반이편성되어처음만난친구들과인사를했을때그녀의얼굴이가장먼저눈에들어왔다.가히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제법큰키에계란형의얼굴,서글서글한눈매는단연돋보였다.그시절만해도거개의아이들이소매끝은콧물로번들거리고꾀죄죄한차림새였지만그녀는깔끔한녹색의원피스에보기드문가죽신발까지신어친구들의기를죽이기에충분했다.

그녀와몇번이나말을걸려고했지만실패했다.생김새처럼여간도도하지가않아옆에만가면찬바람이쌩쌩불정도였다.그녀의집은학교에서멀지않은길가의큰기와집이었다.친구들은그녀의아버지가시청과장으로높은사람이라며수군거렸다.방과후집으로갈때몇번이나그녀의뒤를따라갔지만힐끗뒤를돌아보곤눈살을찌푸렸다.그러니더주눅이들어오그라들수밖에.그녀를생각하면떠오르는게있다.5학년때던가가을소풍을가서반별노래자랑을했었다.그녀는반대표로나와동요가아닌어려운노래를불러1등을했다.중학교가서야그노래가질헤르의’로렐라이’라는것을알았다.

그녀를다시만난건국민학교졸업후10년이지나서였다.졸업10년모임이라고해서모교에갔을때그녀J도와있었다.그때20대초반의대학생들이었는데역시그녀의자태는한눈에들어왔다.더이쁘고성숙해진그녀를만나숨이막힐듯한충격을받았지만끝내말한마디붙이지못하고헤어졌다.그게그녀와의마지막만남이었다.그렇지만사람들의생각은같아서였을까.가끔씩초등학교친구들이만나면관심사는단연J의근황에관한얘기였다.다들’오르지못할감나무쳐다만본다’고술이라도한잔걸치면용감하게부딪치지못한자신들의옹졸함을나무라며서로졸장부라고험담을늘어놓기까지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했던가.서울에있는여대를졸업하고꽤큰기업에서근무했던그녀는고향의한중소기업사장아들과결혼했다.그녀의남편은고교3년선배였고아버지가운영하는식품회사의전무였다.그소식을듣고친구들은모두들한탄했다.그런남편만날줄알았으면좀더적극적으로나설터인데하며땅을쳤다.그결혼도그녀아버지가나서서친구아들에게보낸것이라고했다.그후한동안은그녀가화제에오르지않았다.그러다가20여년이흘러40대후반이되었을때그녀에대한새로운소식들이친구들의입을통해날아들었다.

10여년전그녀남편이경영했던식품회사는부도로문을닫았다고했다.빚잔치로살았던집마저날린그녀의가족은초라해진꼴을보이기넘새스럽다며인근B시로이사를갔다.그렇지만그곳에서의삶도팍팍하긴마찬가지였던것같았다.노인이50대후반이되었을때날아든소식은도저히믿을수없는얘기였다.친구중누군가가우연히바닷가어떤명소에갔다가그곳에서포장마차를하고있는그녀를보았다는것이었다.그소식을전해듣고노인에게다시전해준친구가이르기를그녀의그고고하고아리따웠던자태는간곳없고세상살이에피폐해진노인의모습만이보였다고했다.그녀를도우는남편역시삶의때에찌든볼품없는늙은이였다며헤헤거렸다.그말을듣고노인은치밀어오르는알수없는분노에며칠동안몸살을앓아야만했었다.

그로부터10년이지난오늘아침그녀의죽음을들었다.노인은다시눈을감았다.살짝웃을때면엷게파였던볼우물,상큼한눈매와어깨까지내려갔던까만머리카락이떠올랐다.홍조를띤가녀린얼굴,매몰차게흘겨보던눈초리가아직도선명하게아른거렸다.그게다사람이살아가는길이거늘.노인은한숨을쉬며빈잔을채웠다.그러고는오디오에다시’슬픈로라’를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