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띄우는 편지

R에게.

그동안별일없지?어영부영하다보니어느듯시월에들어섰네.올한해도별로한것도없이시간을보내고나이만한살더먹게생겼군,그래.아침,저녁불어오는소슬바람을맞으니어린시절마당가녁에서들려오던풀벌레소리가생각나네.그시절,모든게부족하고피폐한살이였지만그래도나이먹으니그신산辛酸의시절이자꾸그리워진다네.

자네,생각나지.우리가고3때였으니1963년가을이었어.그때자네는다녔던교회의학생회장이었지.나도내가다녔던교회의회장이었고.그래서가끔교파는달랐지만두교회학생회가배구시합이나야유회를같이가곤했었지.자네교회에예쁘장한여학생이있어내가소개시켜달라고몇번이나사정했지만자네는모른체했었잖나.기억나지.

그런데요맘때였을거야.수업을마치고집으로가는데자네가날불렀었네.그러고는느닷없이못난사과콘테스트를한다며참석할수있는지물었잖아.그게뭔데하고물었더니참석하는사람들이각자제일못난사과를가져와서심사를한다는게야.자네는며칠후토요일오후에B동호주선교사사택에서모임이있다며나더러참석하라고했었지.몇명이모이냐니까자네와나,그리고여학생둘이라며싱긋웃었다네.

토요일오후중앙시장에서제일못난사과를사서B동산비탈에있는선교사사택으로갔었지.선교사부부는몇번만난적이있어반갑게맞아주었다네.내가놀란건따로있었어.그토록소개시켜달라고졸랐던그여학생C가다른여학생하나와다소곳이앉아있었던게야.그여학생들은인근여고의1학년들이었지.

우리는못난사과콘테스트도하고,당시에는구경조차하기힘들었던맛있는음료수도마시면서재미있게시간을보냈지.참,내가갖고갔던베토벤의피아노소나타음반도들었다네.지금도생생히기억한다구.연주자는미국피아니스트루돌프제르킨이었고,’월광’과’비창’,’열정’이수록되어있었지.기억하건데그날저녁식사는카레였던것같아.그때는좀체로구경하기힘든음식이었다네.

R,나는선교사댁에서의모임보다도그날밤의풋풋한데이트가더가슴에남아있다네.자네의배려였지.식사후자네는볼일이있다며다른여학생과가버렸고,나는자네의부탁을핑계삼아C를그녀의집까지데려다주기로했었잖아.그녀의집은D동이었다네.우리는달빛을받으며호젓한오솔길을걸었었지.베토벤이달밤에뒷짐을지고오솔길을걸었듯이말일세.그녀와나는베토벤의’월광’을화제로주거니받거니얘기를나누며인근로터리께로왔었다네.

그런데재미있었던건그후의일이었지.그녀의집으로가는길목에그유명한P동단팥죽집이있었잖아.찐빵과도너츠도함께팔았던이름난집이었어.왜자네가다녔던교회옆에있었던그집말이네.내가그녀에게단팥죽집에가자고제안했고,그녀도순순히들어갔었다네.단팥죽과찐빵을시켜놓고하하호호재미있게얘길나누고있는데서너명이문을열고들어오는게야.봤더니아뿔사,우리반그유명한여드럼박사K와안면있는다른반친구들이었다네.

K는나를보자삐딱한미소를지으며한소리날리는게야.야,자슥봐라.니운제부터가수나(계집애)달고(데리고)댕깄노.쑥구리(숫구렁이)꽁(꿩)자(잡아)묵는다꼬재주좋다야.나도벌떡일어나서한마디했지.아이다,임마.오늘첨교회에서만나가꼬잠시이야기하고있었능기라.지랄~일캐도알고절캐도앙께댔다고마.이렇게친구하고옥신각신하는사이에C가벌떡일어서더니쏜살같이밖으로나가버렸다네.내가이내뒤따라나갔지만그녀는이미어둠속으로묻히고안보였어.그제서야K는미안했던지그냥농담한번한것뿐이라며변명했지만그걸로끝이었다네.지금생각해도참얄궂은마무리가되고말았지.어쩌면좋은추억이될뻔했는데말이야.

R.지난시절을잠시떠올려보았네.다부질없는얘기지만그래도그시절이그리운걸어쩌나.

언제시간되면만나서옛이야기하며밥이나한끼먹지.그래,항상건강하고하나님의은총을비네.

그럼이만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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