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사선死線을 넘었다 (1)

지난연말아내가길가다가빙판에미끄러져다리를다친후로내삶이좀팍팍해졌다.

언제나아내가해주던밥과음식만먹다가이젠직접해야되니고생이이만저만아니다.물론이런저런지시는아내가하지만손과발로움직이는건내몫이니곱다시가정부나진배없다.

그렇지만2월초깁스를풀고한달정도만요양하면예전처럼활동할수있다니두달만고생하면된다.

아내의간병을하다보니결혼초폐결핵으로죽을고비를넘긴일들이주마등처럼떠오른다.그때아내는얼마나황당하고놀랐을까.이까짓깁스뒷바라지를거기에비하면아무것도이닐것이다.

내폐결핵투병기를소개하자면좀더거슬러올라가야한다.

지난12월에글을올렸듯육군으로입대한게1967년12월이었다.6주간의신병훈련을마치고후반기교육을받은곳은광주에있는육군포병학교였다.주특기를포병통신으로받아그곳에서6주간의교육을더받았다.당시68년1월의김신조일당청와대습격에다가미군함프에블로호가북한군에납치되어정국은일촉즉발의위기상황이었다.그때제대특명까지연기되었고,우리는두다리에모래주머니를차고교육을받았을정도였다.그만큼상황이위태로웠다.

포병학교에서의교육후나는조교요원으로자충되었다.사연은길지만그곳에서참좋은장교를만나행정사병으로발탁되었고,학과계획을짜는부서에서문관과함께근무했다.

그러다가68년11월엔가울진,삼척의무장공비침공으로동해안을지키는부대가증설되었다.행정장교가예비사단으로갈마음있느냐는말에솔깃하여경북북부지역의A시에있는부대로자원전출했다.

그게68년12월중순이었다.막상부대에도착하니월남에서귀국한제대말년의고참병장들만우글거려도저히근무할마음이없었다.요행히내주특기는선착순으로월남에갈수있는병과여서파월신청을했다.

잠시후전달병이내이름을불러연대인사과(S1)에갔다.부관(인사과장)이나를보더니필체가좋다며내일부터훈련받지말고인사과에서근무하라고했다.월남갈생각이었지만연대인사과에서중사의조수로근무하게되었다.

이런저런우여곡절끝에다음해인69년2월,차트글씨를잘쓴다며사단인사처(G1)에서근무하게되었다.

안전과장인대위의조수로비공식파견근무(‘비파’)를시작했다.’비파’는점호도없고내무생활도없었다.

나처럼파견된병사서너명이밥은연대취사장에가서얻어먹고잠은사무실에서적당히해결하는생활을하게되었다.그런연유로육신은좀편했지만식사를거르기가일쑤였다.간혹라면으로때우고.

이런불규칙적인생활을하다가그해4월경감기에걸렸는데좀체로낫질않았다.한달여골골거리니까장교가의무대에한번가보라고했다.갔더니엑스레이를찍고몇가지검사를했다.잠시후엑스레이필름을본의무장교가엠블란스를부르라고하더니중증폐결핵이라며D시의육군병원으로후송을시켰다.

육군병원에서의생활은그야말로천국이었다.폐결핵(TB)은안정과영양이최우선이라며24시간침대에서쉬게했다.식사도하얀쌀밥에고깃국이었고매끼니마다달걀,사과나토마토가간식으로나왔다.

매일아침군의관이검진을왔고주사를맞거나약을주었다.약과세끼밥만잘먹으면자든지바둑을두든지아무도간섭을하지않았다.나는집에연락해서라디오를가져왔고,왼종일라디오에서음악방송을듣는게일과가되었다.

몇차례의엑스레이검사와군의관면담후69년7월인근M시(당시는군郡이었다)에있는폐결핵전문병원으로다시후송되었다.

군대에서좋은식사에자유스런투병생활을했지만내맘은별로좋질않았다.왜냐하면어릴적에폐결핵에걸려죽은사람을보았기때문이었다.우리뒷집의친구아버지였는데폐결핵으로고생하다가결국돌아가셨다.50년대중반만해도워낙곤궁했던살림이어서영양가있는음식은해먹을수가없었다.당시집집마다밤이면달팽이가나와서벽을타고올라가곤했다.그래서벽마다달팽이가기어간흔적이무슨그림처럼남아있었다.사람들은이달팽이가영양덩어리라고믿었고그걸잡아폐결핵걸린친구아버지가고아서먹는걸보았다.그렇지만친구아버지는결국돌아가셨다.

그런유년의좋지못한기억으로폐결핵(우리는’폣병’이라고했다)에걸리면죽는것으로알았다.꽃다운나이에죽을병에걸렸으니내맘은참담하기그지없었다.

5개월여의병상생활끝에그해11월의병제대를했다.

내기억으로당시엔큰돈이었던십몇만원을보상금으로받았다.멀쩡한몸으로입대했다가중병에걸렸으니국가에서약값조로지불했던것이다.

제대후엔의사의처방대로약도먹었고2년정도지나나았다는말을들었다.

첫번째사선死線을무난히통과한셈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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