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반세기도훌쩍넘겼으니이젠털어놔도될것같다.
나이도먹을만큼먹었고,세상풍파도나름대로겪었으니두려울것도없다.다만,아내에겐아직도실토하진못했지만손목한번잡지않고끝난첫사랑이다보니나중에알더라도별로책잡힐게없으리라.
헤어진지어언오십여년을헤아리게되었으니얼굴도가물가물하고영롱했던그목소리도희미한데애틋했던그시절의추억만은아직도또렸하게남아있다.
그녀를처음만난게고교1학년때였으니1961년이었다.
5.16군사혁명으로나라가어수선했던시절,지금은저세상으로먼저떠난친구네집에서였다.친구와는초등학교때부터친하게지냈고,저녁마다그집으로놀러다녔다.
친구네집에는작은엄마가낳은여동생이셋있었는데큰동생이우리와같은학년이었다.여동생들은모두얼굴이예뻐선망의대상이었고,여동생친구들도그집에꽤나들락거렸었다.
그친구네집에서내첫사랑의그녀를만난것이다.
사범계고교에다녔던그녀는나보다나이가한살많았다.
그렇지만날짜를따지면불과두달정도빠를뿐이었다.그때만해도매사에소극적이고부끄럼을잘탄나에비해그녀는무척활발하고명랑했다.
가끔여동생친구들과어울려얘기를나눌때내가존댓말을쓸라치면그녀가선수를치곤했다.
아따,같은학년끼리뭐할라꼬말을높이샀노.고마우리말놓고편안하이지내자.
매사가그런식이었으니어떤가요가사처럼그녀앞에만가면나는항상작아질뿐이었다.
그녀의고향은부산인근군郡이었고,공무원이었던부친이진주로발령받자전학온것이었다.
그때만해도’러브레터’란게있었다.
그해성탄절을앞두고그녀에게만나자는쪽지를보냈다.그것도12월25일밤7시에촉석공원계단에서기다리겠다고했다.몇번블로그를통해비슷한사연을올렸지만,그엄동설한에두시간이나벌벌떨며기다렸지만결국바람을맞고말았다.
그이야기를친구에게했더니자리를주선해주겠다고나섰다.고2때인62년도봄,배건너칠암동어떤중국집에서였다.나와친구,그녀와누구해서넷이만났다.
그시절엔귀한음식이었던탕수육을시켜놓고친구가배갈을주문했다.한사코못마신다고사양하는내게그들은몇잔을권했고난생처음독주를마시고고생했던그날이지금도기억에또렸하다.
그녀를생각할때마다기억나는음악이있다.
그시절아침마다등교시간에교내방송을통해들려준곡이있었는데모차르트의’터키행진곡’이었다.
구슬처럼톡톡튀는멜로디도좋았지만중간부분(트리오)에자지러질듯숨가쁘게흘러나오는피아노의음률은바로그녀를연상시켰다.그래서지금도그곡이흘러나오면혼자서미소를짓곤한다.
또하나,멘델스존의바이올린협주곡역시그녀를떠오르게했다.곡이시작되면현악기들의짧은속삭임에이어간드러지게모습을드러내는독주바이올린의선율.당시방송국에서희망곡을신청받는프로가있었는데그곡을신청하고라디오에서들었을때의그감흥은잊을수가없다.
그녀와의사이는지지부진했다.
솔직히고백하건데,나혼자서좋아했을뿐이었고그녀에게있어서의나는몇명의아는남자애들중에한명이었다.
게다가그녀가그해여름부친을따라고향으로전학을갔다.그때부터나의편지질이시작되었다.지금도기억하는그녀의집주소로아마도수백여통의편지를보냈으리라.그렇지만그녀는내게단몇장의엽서만을보냈다.
일방적인수모를감수하면서도나는참으로끈질기게그녀를놓아주질않았다.심지어학교까지찾아갔다가만나지못하고다음날그녀가사는동네길목에서만나고오기도했다.
지금생각해도’일편단심민들레’였다.
내가고교졸업후고향에서음악감상모임을가졌던64년부터그녀와의사이가달라졌다.
그해9월추석무렵뜻밖에도그녀가감상회장으로찾아왔다.그때부터그녀는좀더친숙한눈길로나를보았고,다음해부산에살게되면서더가까와졌다.
66년엔가큰맘먹고그녀의집을찾은적이있었다.그녀는물론모친까지도나를환대했고따뜻한점심까지얻어먹는행운을누렸다.그녀의오빠를비롯한가족들도호의적이었다.
인연은하늘이맺어주는것이라고했던가.
그녀와의이별은쉽게다가왔다.67년12월군에입대하고다음해6월첫휴가를나와그녀의집으로무작정다시찾아갔다.그녀는집에있었고,나를과수원으로데려갔다.
원두막에서잘익은복숭아를깎아주며그녀는단호하게말했다.
다시는찾아오지말라고.지금사귀는사람이있으니이젠잊어달라고.
그뿐이었다.이상하게그말을듣는내마음은담담했다.결국그렇게되리라고생각이나했듯이.
나는그녀와웃으며헤어졌다.
몇년전이었다.
고인이된친구가뜬금없이그녀의얘길꺼냈다.그러면서그녀의전화번호를알고있는데생각있냐며넌지시물었다.나는웃으며생각없노라고했다.
지금와서만나면뭣할건데.괜스리’서리맞은머리’에검버섯숭숭난얼굴내밀고무슨얘길나눌건데.
차라리앳된소녀의그모습을평생간직하며살고싶었다.
이젠그녀도내게있어희미한첫사랑의그림자일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