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지난64년봄고향에서고전음악감상모임을가진적이있었다.

처음두번은다방에서모임을가졌지만,그때만해도다방은나이지긋한어른들이무료한시간을즐기던장소여서그들에게생뚱맞은고전음악은지극히듣기싫은소리였을게뻔했다.

더러감상회도중멋모르고들어왔다가노골적으로불만스런표정을지으며휑하니나가버리는사람들이있었다.

그때마다나는좌불안석이었고다방여주인의표정을살피느라마음고생이심했었다.

회원들과상의끝에당시시내에하나밖에없었던예식장을빌리기로했다.

도립병원앞동산예식장은좌석도거의2백석수준이었고무대가있어음악감상회장소로는그만이었다.

그렇지만임대료가상당했고그것도매주마다모임을갖다보니누적되는적자가엄청났다.

그큰공간에매주잘해야3,40명정도가모였으니금요일만되면오늘은또어떻게적자를메꾸느냐가고민거리였다.

금요일저녁이되면일찌감치예식장으로가서빌려온오디오의턴테이블에LP음반을올렸다.

대개만토바니(Mantovani)악단(樂團,현악기군群위주의관현악단이었다)이연주하는오페라아리아였다.

첫곡이푸치니(G.Puccini)의오페라’잔니스키키(GianniSchicchi)’에나오는유명한아리아’오,사랑하는나의아버지(Omiobabbinocaro)’였다.

이아름다운멜로디를현악기무리의연주로들으며오늘밤에는과연몇명이나올까하고가슴태웠던생각이난다.

제목을올리며오래전고인이되신아버지생각이떠올랐다.

일제강점기시절만주지역에서청년기를보냈던아버지는운전을배우셨다.그게천직이되어6.25사변이후고향에서운수업을시작했다.공사판에서쓰는덤프트럭도했다가나중에는택시회사에차를넣어명색이운수사업을벌였다.

사업은그런대로됐지만당시만해도보험제도가없어사고라도나면차주車主가엄청난보상을해주어야만했다.

그러다보니할아버지께서땀흘려장만해둔초전논과도동과수원이결국은사업치닥거리로날아가고말았다.

할아버지는유언으로도동과수원을장손長孫에게꼭물려주라고신신당부를하셨지만소용이없었다.

1972년4월내가장가를가게되었다.

그해3월초교회목사님의소개로부산까지가서맞선을보았고달포만에결혼을하게되었다.

그렇지만어려운집안사정을뻔히알고있었던터라부모님께장가간다고손을내밀수가없었다.

일단부모님께저간의사정을설명하고모든결혼준비는제가할터이니신경쓰시지말라고말씀드렸다.

4월하순의결혼날짜가며칠후로다가왔을때가까스로도동(상평동)에방두칸을전세로얻었다.

집뿐만이아니었다.신부패물,옷감은물론이고모든비용을내가마련했다.다행히어떤친목회에가입하고있었는데회원중에금은방하는이도있었고포목점을하는친구도있었다.

도동에얻은전셋집에도배를해야하는데그걸아버지가직접하시겠다고나섰다.

그날아버지는친구두분과함께도배지를사와서깔끔하게도배를해주셨다.아들장가보내는데재정적인지원을못하니까그걸로라도거들고싶어서였을것이다.

도배를마친아버지와친구분들을도동어떤식당에모시고가서저녁대접을했다.

술도곁들여식사를끝내고친구분들은먼저가셨다.

술이거나하게오른아버지를모시고도동에서좀먼길이었지만일부러걸어서옥봉남동에있는집에까지갔다.

물론시내까지가는버스가있었지만며칠후면분가分家해서살아야했기에일부러아버지를모시고걸었다.

도동에서뒤벼리를지나야집으로갈수가있었다.지금기억으로그날밤은유난히도달이밝았던것같았다.

뒤벼리초입에들어서자수리조합사무실이나타났다.어린시절도동으로소풍갈때그곳을지나면남강물이유난히시퍼렇던곳이었다.조금더가면오른쪽으로처녀골(여우골?)이라고해서낮에가도으슥한곳이나왔다.

가다가아버지는그곳수리조합앞에잠시앉아강물을내려다보며담배를피웠다.

연기한모금을길게내뿜으시던아버지는나직히내이름을불렀다.

바구(바위,어린시절아명兒名)야,아부지가마이(많이)원망시럽제.아입니더,아부지.

그래,니가말안해도다안다.부모가되가꼬자슥장개보내는데한푼도몬보태주고말이다.니가우찌우찌해가꼬장개밑천맨드능거보는부모맘은우떻겄노.내가심(가슴)도아푸다.

아버지의탄식은계속되었다.

너거할아부지가도동과시원(과수원)그거라도손대지마라캤실때그말을들어야되는데,그래야니가고상(고생)을안하는데말이다.바구야,아부지는참말로미안타.용서해라.

아이,아부지.무신말씸을그리합니꺼.지는아무시랑토(원망도)안합니더.그런말씸마이소.

담배를다피우고일어서는아버지의눈가에눈물이보였다.그밝았던달빛때문에.

아버지는멋쩍은듯돌아서서손등으로눈을부볐다.

그날따라남강물이달빛을받아유난히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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