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추억나들이 (27)

다음날오후영호는일찌감치진주성지晋州城址로갔다.70년대중반성지복원사업이진행된후진주성은말쑥하게정비되었다.그전엔촉석루앞공원에방송국도있었고도서관까지자리했었다.이젠말끔하게정비되어1593년계사년왜적의2차침공때장렬하게순국하신7만영령들께부끄럽지않은성지聖地로써의위용威容을갖추었다.

진경과만나기로약속한논개사당은촉석루우측에있었다.시간여유도있어영호는오랜만에사당을참배했다.70년대까지만해도논개부인의영정은이당以堂김은호선생이그린초상이었다.오늘날의한국화를이루게한터전을닦았고어진(御眞,임금의초상)을그린이당선생을후에친일화가라고낙인찍어그가그린영정을떼어내고다른화가의그림으로교체했다.

그생각을할때마다영호는은근히열을받곤했다.일제강점기36년동안대한의유명인물들은어쩔수없이일제의압제에굴복할수밖에없었을터였다.물론자신의영달을위해스스로머리를굽힌친일파도있었지만대다수의인사들은자신의안위를위해일제에협조했을것이다.가뜩이나심약心弱한예술인들이야말해무엇하리오.그들이친일파라면자의든타의든신사참배하고천왕에게배례한일반백성들도친일했다고몰아붙일것인가.

춘원이나육당,난파와같은빼어난인재들을일제는어떻게든회유코자갖은수단을부렸을것이다.그난국을회피하려고목숨을끊을수는없었겠지.그런인재들이죽는건대한의귀중한보물을잃는것이나다름없을터였다.

그런데도그들이친일했다고입에게거품을무는자들의조상들은신사참배도않고오직독립운동만했단말인가.

몇년전그토록친일을매도했던어떤국회의원의조부가일제헌병으로충성했던게밝혀진적이있었다.

우리역사에큰족적을남긴분들을무조건친일파라고낙인찍을게아니라그들의공功과과過를잘따져억울함이없도록해야하지않을까.

사당참배를마친영호는앞뜰에선’의랑논개비義娘論介碑’앞에섰다.해방후중창간된경남일보의사장을역임했고지방문화제의효시인’개천예술제(처음이름은’영남예술제’)’를만든파성巴城설창수선생이지은비이다.

파성은영남을대표하는걸출한시인이었다.비의글씨는지역출신서예가청남오제봉선생이썼다.

영호는이비를볼때마다솟구쳐오르는격정을느끼곤했다.듣기로처음이비의글을미당未堂서정주선생에게부탁했지만미당은진주에도파성같은문장가가있다며사양했다고한다.

<하나인것이동시에둘일수없는것이면서민족의거슴팍에살아있는논개의이름은백도천도만도넘는다.마지막그순간까지원수와더불어노래하며춤췄고그를껴안고죽어간입술은앵두보다붉고서리맺힌눈썹이반달보다고왔던것은한갓기생으로서가아니라민족의가슴에영원토록남을처녀의자태였으며만사람의노래와춤으로보답받을위대한여성으로서다……(중략)피란매양물보다진한것이아니어무고히흘려진그옛날민족의피는어즈버진주성터의풀거름이되고말아도불로한처녀논개의푸른머리카락을빗겨남가람이천추로푸르러구비치며흐름을보라.애오라지민족의처녀에게드리고픈민족의사랑만은강물을따라흐르는것이아니기에,아아어느날조국의따사로운금잔디밭으로물옷벗어놓고거닐어오실당신을위하여여기에비를하나세운다.>

비문을읽으며감회에잠긴영호의귓전에들리는소리가있었다.

아이구,일찍나오셨네예.

뒤돌아본영호의앞에한여인이서있었다.

하진경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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