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향기
아가을인가아가을인가아~~~~가을인가봐
물동이에떨어진버들잎보고
물긷던아가씨고개숙이지
나운영선생이작곡한’아가을인가’를인터넷에서찾아듣고있던노인의얼굴에살짝미소가흘렀다.
열린창문너머하늘엔둥근달이떠올랐고창문사이로시원한산들바람이밀려들었다.
그래,그래도아련한그시절이좋긴좋았어.내일에대한꿈도있었고말이지.
이젠하얗게물든머리카락을쓸어올리며노인은지긋이눈을감았다.
1960년대초였으니어언반세기를훌쩍넘겼다.
그때가고2였으니열일곱살,소년이라고불러야될시절이었다.여름방학이끝나고9월이며칠후로다가왔다.
5.16혁명이난지도1년이지났지만여전히고단하고힘든시절이었다.
재건국민운동이그해시작되었다.지금도노인이기억하는건양복을입었던선생님들이재건복이라고해서모택동이가입었던목밑에두개의깃이달린옷을입었던일이었다.양복깃을고쳐작은깃으로바꾸다보니본래깃자리의색깔이선명하게남아우스깡스럽게보였던기억이났다.
얼마안가’펄펄펄휘날리는재건의깃발아래서…’하는재건가요도나왔었지.
소년이친하게지냈던친구중에인사동뚝밑에사는애가있었다.
지금은없어졌지만인사동에서진주사범쪽으로가다보면제법높은뚝이있었고사범학교쪽뚝아래는나불천이라는작은개천이있었다.소년은친구와뚝을넘어나불천에가서송사리를잡기도했었다.
그친구의집은본채와아랫채가있는함석집이었는데방이다섯개나되었다.친구의어머니는아랫채방두개를세놓았다.그방중에진주사범병설고교에다니는또래의여학생이혼자서자취를하고있었다.
8월하순께나되었을까.인사동그친구의집으로놀러간소년은친구와함께노래를불렀다.그당시만해도별다른오락꺼리가없었던터라친구들끼리모이면음악책을꺼내놓고목청을돋궈노래를부르곤했다.
밤여덟시나되었던것같다.둘이서한창’돼지멱따는’소리를지르고있는데노크소리가났다.노래를멈춘친구가문을열었다.방밖어둠속에아랫채자취하는여학생이서있었다.
무신일인데예?
그때소년들은동급생여자에게도깍듯이존댓말을썼다.
저기,배안고픕니꺼?이거고오매(고구마)찐긴데좀잡사보이소.
소녀는고구마가담긴그릇을살며시방안으로들이밀었다.
아이쿠,고맙심더.그라모선희학생도좀들어오이소.염치없그로우리만묵을수있십니꺼.
친구의권유에소녀는잠시머뭇거리다가방안으로들어왔다.
선희라는이름의소녀에게서는향긋한크림냄새가났다.소녀의향기였을까.
앗따,선희학생이들어온께구리무(크림)내미(냄새)가진동을하네예.
배시시웃는소녀와소년들은삶은고구마를먹으며하하호호재미있는얘기들을나누었다.그때의이야기래야학교선생님흉이거나숨어서본영화에나온배우들이야기가전부였다.
그런데재미있는일은다음에일어났다.밤열시나되어소년이일어났고친구와는방안에서작별인사를나누었다.
소년이막대문을나서자누군가가쪼르르달려나오는소리가들렸다.소녀였다.소녀는뭔가담긴종이봉투를소년에게내밀었다.그러고는소년이채입을열기도전에집안으로들어가버렸다.
집에와서봉투를열어보니삶은고구마가몇개들어있었다.남해가고향인소녀의부모님이농사지은것이라고했다.
그고구마들속에작은쪽지가들어있었다.펴보았더니급히쓴듯몇자적혀있었다.
‘8월29일오후7시,만복당’이게전부였다.
8월29일이면낼모렌데,만복당이라면우체국옆의빵집이었다.당시고교생들이자주갔던곳이었다.
이상타,이기무신편지고?
난생처음여자로부터쪽지를받은소년은고개를갸웃거리다가이내절레절레흔들었다.
아이쿠,큰일날소리,그게갔다가아는친구들한테들키모우짤라꼬.가시나하고만낸다꼬소문나모큰일아이가.
결국소년은소녀의쪽지를무시하고말았다.
며칠후9월초였다.소년을만난친구가다짜고짜격한소릴했다.
야,임마.머슴아자슥이그라모되나.
소년은짐짓딴청을부렸다.
와,무신일인데?
와라이,산무너지나.니선희학생이만복당서만내자캤는데바람맞칬땀서?
아,그쪽지말이가.그래,임마.니도생각함해봐라.아는친구들이버글버글한데그게서가시나만냈다가우짤라꼬?
소년의말에친구는더이상대꾸를하지않았다.한참후친구는지나가는말로한마디했다.
니말도알겄는데요새선희학생이기가마이(많이)죽었더라꼬.내가봐도맘이안좋은기라.참,맘도착하고얌전한앤데,우짜겄노.니가함만내서말이라도건내조오라.
친구의간곡한말에소년은고개를끄덕였다.
소년이친구집에서소녀와다시만난것은추석을며칠앞둔9월중순께였다.
친구가소녀를방으로불러왔고소년은그날못나갔음을사과했다.그시간에갑자기급한일이생겨어머니심부름을다녀왔다고변명을늘어놓았다.소녀는다소곳하게듣는듯했다.
그날밤,집으로돌아갈때소년은미리준비했던쪽지를소녀에게건냈다.이틀후토요일오후세시에서장대에서만나자는쪽지였다.
그렇지만이번에는소년이바람을맞았다.그렇겠지하고예상은했었지만마음이씁스레했다.
추석이지나고도한참후우연히친구의집에서소녀를만났다.소년이입을열기도전에소녀가먼저말을꺼냈다.
그날남해집에간다꼬못나갔어예.
그것으로소녀와의만남은마침표를찍었다.
참,그애가인물이반반한게복스러웠지.같은학년이었으니올해고희거나일흔하나일지도모르겠네.
노인은창밖의둥근달을다시한번올려다보았다.
창문너머에서산들바람이밀려왔다.
그바람결에그소녀에게서났던크림냄새가묻어왔다.소녀의향기라고해야겠지.
이게무슨냄새지.내가잘못맡았나.
노인은괜히코를벌름거렸다.그러고는빙긋웃는웃음이왠지쓸쓸하게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