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그 바닷가

집 안이 고요하다. 아내는 외출했고, 혼자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유투브에서 음악 한 곡을 골랐다. 요즘은 오디오로 씨디를 듣는 것보다 노트북으로 자주 듣는다. 계속해서 다른 음악들이 나오니 편리하고 여유롭다. 오늘 고른 음악은 베토벤의 ‘아테네의 폐허’ 중 ‘터키행진곡’이다. 관현악곡을 피아노 변주곡으로 편곡한 음악이다. 연주자는 구 소련 우크라이나 출신의 피아니스트 에밀 기렐스.

이 음악은 고교 시절 등교시간이면 교내 방송으로 자주 들었다. 흔히들 ‘터키행진곡’은 모차르트의 피아노소나타 11번 3악장만 알고 있다. 그 곡도 좋지만 베토벤의 ‘터키행진곡’도 멋진 음악이다. 곡을 듣노라면 마치 터키 병사들이 창검을 어깨에 매고 행군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커피향에 젖어 아련한 옛 생각에 빠졌다가 문득 그해 4월의 바닷가가 떠올랐다.

내일, 4월 27일은 44년 전 결혼했던 날이다. 그날 고향 작은 교회에서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는 친지가 내준 승용차를 타고 부산 해운대로 신혼여행을 갔었다. 당시만 해도 진주-마산 간의 국도는 포장이 되지 않아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달렸다. 해운대의 한 여관에 여장을 풀고 파도소리를 들으며 밤을 지새웠다.

그때 해운대는 한적한 갯마을이었다. 동백섬을 거닐기도 하고 작은 횟집에서 점심도 먹었다. 따사로운 봄볕이 눈부시게 내려앉은 바닷가 돌팍에 앉아 분홍빛 미래를 설계하다가 한 순간의 말 실수로 신부를 울리고 말았다.

모든 게 내탓이었다. 블로그를 통해 몇 차례 비슷한 글을 올렸듯이 그 결혼은 나 혼자 만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때 우리 집은 계속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상당한 전답을 탕진했고 동생들 학업마저 걱정해야 할 지경이었다. 장남인 나도 고향에서 옳은 직장을 마련하지 못 하고 방송국 작가로 불안정했다.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 도움 없이 결혼 준비를 하다 보니 모든 게 빚으로 충당 되었다. 신혼 집 전세금은 물론 혼수감, 예물, 살림도구에 이르기까지 지인들에게 꾼 돈으로 해결했다. 축의금이 좀 들어오긴 했지만 턱도 없었다.

금방 알게 될 일을 마냥 감출 수 만은 없어 그날 바닷가에서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와서 며칠 있다가 털어놔도 될 일을 성급하게 결혼 다음 날 말한 것이었다. 충격적인 내 얘기에 신부는 멍하니 수평선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더니 고개를 숙이고 훌쩍이며 울었다.

더 이상 얘기하지 않으련다. 이처럼 철 없는 신랑이었던 것을.

그 숱한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번듯하게 아들, 딸을 키워 고2 손자부터 다섯 살배기 외손녀까지 4명의 손주도 두었다. 모두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이 만 하면 됐지 않은가.

남은 삶도 오순도순 잘 살기를 소망해본다.

2 Comments

  1. 데레사

    2016년 4월 26일 at 6:09 오후

    그럼요. 행복한 인생이고 말고요.내내
    두분이서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 바위

      2016년 4월 27일 at 11:28 오전

      데레사님,
      ‘고진감래’란 말이 생각납니다.
      잘 살아준 아내에게 고맙단 인사를 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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