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소설에서 시 한 수를 건졌다

소설가 이문열 씨를 좋아한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내걸기 시작한 80년대 초반부터 그의 글을 읽기 시작했으니 어언 35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묵은 독자인 셈이다. 당시만 해도 매일 같이 출장을 다녔던 터라 차를 타면 반드시 책을 읽었다. 차 바퀴가 구르면 잠 들었다가 멎으면 눈을 떠는 사람도 보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차를 타면 정신이 더 또렷해졌다. 해서 월간지나 단행본을 읽어야만 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을 일일이 헤아리거나 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을 꼽으라면 주저없이 들 수 있는 책이 있다. ‘젊은날의 초상’이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어서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1부 하구, 2부 우리 기쁜 젊은날, 3부 그해 겨울’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2부 ‘우리 기쁜 젊은날’을 인상 깊게 읽었고 그 가운데서도 ‘4. 주점 쩌그노트의 추억’에서 흠뻑 취해버렸다.

취할 수밖에 없는 게 그 내용은 오로지 술로 시작해서 술로 끝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화자話者와 김형, 하가가 빚어내는 술 마시는 모습들은 읽을수록 유쾌하고 속이 후련했다. 물론 약간의 아픔은 있었지만. 그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주저함이나 거침이 없는 작품이었다.

‘쩌그노트’란 거기에 깔려 죽으면 천당에 간다는 전설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그 바퀴 아래 몸을 던진다는 인도의 제례祭禮용 수레로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술집 이름이다. 이 술집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술집 안의 풍경은 지금도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나무창틀의 칠이 벗겨지고 뒤틀린 유리문을 힘들여 열고 들어서면, 네 평 남짓한 홀에 우리가 <악마의 원탁>이라고 부르던 테이블이 다섯 개 놓여 있었다. 둥그런 철판 가운데를 뚫어 연탄을 피울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제법 새로운 고안에 속했다. 그 한쪽에 대여섯 자의 목로가 있고, 목로 안쪽에는 안줏감을 진열해 둔 유리상자가 있었다. 두부, 노가리, 꽁치, 물오징어 따위는 그런대로 팔려 싱싱했지만, 돼지고기나 쇠고기는 언제나 한물 간 느낌이었다. 특히 쇠고기는 빛깔이 변하다 못해 검어지고 겉이 까닥까닥 마를 때까지 남아 있는 수도 있었다……

재미 있는 대목을 한 곳 더 소개하련다.

……그날도 돈이라고는 짜부라진 동전 하나 없는 처지에 우리 셋은 그런 수작들을 주고받으며 쩌그노트로 몰려갔다. 사람이 좋다고는 하지만 계속되는 우리들의 곤궁에 지친 주인 내외는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그 경계가 우리를 자극한 바람에 시작부터 터무니없는 허세였던 그 술자리는 오기로 점점 이상하게 발전했다. 김형이 쇠고기 찌개를 시킨 것을 출발로 내가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추가하고 하가가 다시 오징어회를 청했다. 전혀 아무런 상의 없이 삽시간에 급변한 상황이었다. 눈치 보아가며 대포나 몇 잔 얻어마시고 외상을 사정해 보려던 것이, 그 집의 최고급 안주만 골라 떡벌어지게 차린 술자리로 변하게 된 것이었다. 주인 내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우리가 시킨 것을 내왔다. 그러다가 김형이 주인 내외가 들으라는 듯 오늘 깃발은 자기가 잡았다고 선언하고 하가가 덩달아 이차는 자기에게 맡기라며 가까운 맥주홀을 대자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걸 보고 나는 짐짓 밀린 외상이 얼마냐고 물어 더 한층 그 가엾은 부부를 기쁘게 만들었다…….

20160604_175559

이제 시를 소개해야겠다. ‘주점 쩌그노트의 추억’ 첫 머리에 이문열은 시 한 수를 올렸다. 아직 그가 시를 발표했단 소린 듣지 못 했다. 물론 소설가니까 시 정도는 쓸 수 있겠지. 나도 시는 잘 모르지만 그의 시는 내게 신선한 그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 방금 긴 여행에서 돌아온 듯, 우리는 항상 피로하였지. 이우는 세월의 바람 소리를 녹슨 시계탑의 문자판 위에서 듣다가 문득 돌아본 거리, 그 섬뜩한 넓이에 놀라 우리는 뛰어들었지.

그곳에서 우리는 검은 운명의 별을 보았고, 현란하여 애매하던 언어를 쫓아 다녔지. 천장에는 언제나 무지개가 걸려 있었고, 그 찬란한 영광 아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유탕遊蕩의 잔을 들었던가. 갓 돋은 아집과 독단의 나래를 오만하게 또는 불안하게 퍼득이며.

어느 저녁, 그러나 이윽고는, 우리의 원탁이 짙은 우수로 덮이고 나는 그 너머 흔들리는 허망을 보았지. 환락 속에서 오히려 무성하던 피로, 춤추는 아이들의 머리에는 백발이 사유처럼 자라고, 알지 못할 슬픔에 젖은 나는 영원한 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지.

( 이 겨울, 그리하여 나는 주소를 가진다는 끔직한 기쁨에 애착하면서도 내내 그곳이 궁금하였고, 밤 새워 긴 편지를 썼었다. 그러나 새벽 희뿌연 창가에선 늘상 찢기 마련이어서, 매일 아침 나는 한 통씩의 편지가 밀리곤 했다. )

그 뒤 내가 돌아왔을 때 쩌그노트는 문을 닫은 후였고, 아이들도 가랑잎처럼 흩어져 가버렸다. 아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철과 플라스틱의 그늘, 우중충한 시대의 뒷골목으로 영영 사라져 가버렸나, 이 거리 어디엔가 다시 모여 니힐의 잔에 얼굴 묻고 있는가… >

내 소견 한 마디. 우리나라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하기사 노벨상도 한물 갔지만), 이문열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의 소설 ‘변경(3부작 12권)’은 역대 어느 수상작 못지 않게 훌륭하다고 믿으니까. 물론 어디까지나 내 소망이다.

4 Comments

  1. 봉쥬르

    2016년 6월 6일 at 4:26 오후

    바위님

    여전히 왕성하시군요
    오랫만에 여러 글들 읽어보고 갑니다
    이 댓글이 입력될진 모르겠습니니다만
    여러가지 죄송한 마음 실어 인사드리면서
    절하고 갑니다^^*
    내내 강건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라면서…

    • 바위

      2016년 6월 6일 at 10:28 오후

      그간 안녕하셨지요.
      그래도 위블에 글 올리며 조블의 추억을 되새겨봅니다.
      삼천포에서 한 잔하고 싶었지만,
      다음으로 미루어야겠지요.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십시오.

  2. 봉쥬르

    2016년 6월 6일 at 5:44 오후

    내내 맘 편하질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 바위

      2016년 6월 6일 at 10:29 오후

      제가 오히려 죄송했습니다.
      감사합니다.

Leave a Reply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