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묵은 사진첩을 열었다. 했더니 열아홉의 소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서있다. 사진의 왼쪽은 필자이고, 오른쪽은 고교 동창 R군이다.
이 사진을 찍은 게 아마도 1964년 3월 초순이었을 게다. 그때 나는 고교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시험치러 갔다가 낙방을 먹었다. R 역시 마찬가지였다.
R과 나는 고교 3학년 때 문과반에서 같이 공부했고, R은 P동에 있는 교회, 나는 G동에 있는 교회에서 학생회장을 하며 가깝게 지냈었다. 경남 남해 창선 출신인 R이 살고 있었던 B동 언덕배기 집에도 자주 갔었다. 갈라치면 R의 할머니가 끓여주셨던 ‘물메기 떡국’을 얻어 먹곤 했었다. 쌀가루를 그냥 주물러 떡가래(가래떡)를 만들고 물메기 알을 넣어 씹으면 따갈따갈 소리나는 ‘남해식 떡국’을 먹기도 했었다.
설명이 길었다. 위의 사진은 진주교육대학을 찾아간 기념으로 찍었던 사진이다. 그해 고교를 졸업한 나와 R은 대학 입시에 떨어졌고 재수했다. 지치고 나른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둘이서 의기투합하여 생각해 낸 게 고전음악 감상모임을 만들자는 거였다.
회원모집을 하다가 지도교수로 모실 분을 찾아간 곳이 진주교육대학이었다. 당시 교대 음악교수는 P 씨였다. 찾아간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P 교수는 교대 학생 두 사람을 회원으로 추천해 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당시 B교회 목사 따님인 P 학생과 S교회 장로 따님인 R 학생이었다. 이 학생은 베토벤의 피아노소나타 8번 ‘비창’을 잘 연주했었다. 그후 P 교수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갔다.
P 교수는 회원 추천과 지도교수 승락을 한 후 우리 둘을 교수실로 불러 커피를 내왔다. 그러곤 턴테이블에 엘피 음반을 올렸다. 둥둥둥 팀파니의 타악기 소리와 함께 터져나오는 관현악의 울림,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였다. 아마도 얏샤 하이페츠의 연주였으리라. 그 음악을 들으며 얼마나 가슴 설레였던가.
학교 마당에 나와 둘이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누가 어떤 이유로 찍어주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래도 그 시절 이 사진 한 장 남은 게 얼마나 소중한가. 내 젊은 날의 한 순간을 보는 듯하다.
오래 묵은 사진 한 장,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실머리를 잡는 것 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