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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풍수 새 장을 연 최창조 교수

한국 ‘자생풍수의 대가’

최창조 풍수학자 겸 前서울대교수

월간 산 3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풍수 지리학자 최창조 교수는 다리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관악산 자락 호암산에 갔다 왔다. 최근에는 도시풍수란 새 책을 내고 다시 활동반경을 점차 넓혀나가고 있다. 도시풍수 다음의 책은 무슨 내용일까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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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량:막걸리 3되, 취미:등산, 존경인물:김구, 가훈:건강제일, 감명깊은 책:국민학교때 방학생활, 감명 깊은 영화:대부, 스트레스 해소:술, 좌우명:땅은 거짓도 없고 용서도 없다….

장난으로 적은 게 아니다. 본인 인물소개란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그것도 예사인물이 아니다. 좀 우습기도, 황당하기도, 솔직한 것 같기도, 괴짜 같기도 하다.

이 당사자가 누구냐 하면 ‘한국 풍수의 대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그의 이름 앞에 붙어 다니는 인물이다. 한국의 풍수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고, 대중화시킨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알 사람은 안다. ‘아니, 근데 그 사람이 자기 인물소개를 저런 식으로 한단 말인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를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이라면 그의 해맑은 표정, 소박한 품성, 무욕의 기질에 능히 그럴 수 있을 거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풍수의 대가’ 최창조(58) 前 서울대교수. 한국에 자생풍수란 이름으로 풍수를 대중화시킨 건 순전히 그의 업적이고 공(功)이다. 90년대 그가 쓴 책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가 쓴 글은 일간지 한 면을 장식했다. 풍(風)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풍수(風水)를 알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전성기였다. 풍수잡설(2005), 닭이 봉황되다(2005), 땅의 눈물 땅의 희망(2000), 북한 문화유적 답사기(1998), 한국의 자생풍수(97년) 등 그가 쓴 15권의 책은 웬만한 사람이 들어만 봐도 솔깃한 것들이다. 90년대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도 2000년대 들어 좀 뜸해졌다. 나이 탓일까? 세상 탓일까? 체력 탓일까? 여하튼 근황이 궁금했다.

요즘 그는 나이와 떨어진 체력으로 왼쪽 다리에 말초신경 이상이 생겼다. 걸어도 땅에 닿는 감각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그와 같이 관악산 자락 호암산 인근에 잠시 올라갔다. 사실 그때까지 그의 다리가 아프다는 사실을 몰랐다. 산에 올라가 귀띔해줘 알았다. 깁스를 푼 지도 얼마 안됐다고 했다. 대단히 죄송하고 무안했지만 그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의사가 조금씩 운동하는 게 좋다고 오히려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인격의 소유자였다. 다행히 무사히 내려왔다. 근데 상황을 듣고 보니 말이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본인은 전혀 문제없다고 했지만 말이다.


현대의 풍수는 도시가 대상… 체계도 바뀌어야


풍수 관련 집필이나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곧 도시풍수라는 제목으로 책이 출간될 것입니다. 또 예전에 썼던 ‘좋은 땅이란 어디를 말함인가’는 전면 수정 증보판을 거의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전통적인 풍수사상을 어떻게 오늘의 현장에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좋은 땅…’은 전통풍수의 내용을 정리하면서 그간 바뀌어 온 풍수관을 소개하는데 중점을 둔 책이고, ‘도시풍수’는 어차피 거의 전 국토가 도시화된 마당에 지금 필요한 것은 도시의 명당이란 생각에서 그런 부분들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풍수는 풍토에 관한 지혜의 집적입니다. 과거의 풍토가 농촌 경관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라면, 현대의 풍토는 도시가 주된 주거 환경이 되었습니다. 풍토가 바뀌었으니 풍수에 관한 논리 체계도 당연히 그에 따라야 한다고 봅니다. 풍수는 이미 역사 속에서 수없이 많은 연구들이 있어 왔고 그런 것을 재탕, 삼탕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여겨집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풍수에 담겨 있는 정보(information)가 아니라 그 사고방식의 변용(transformation)일 것입니다. 그 점에서 이제 풍수는 점차 과거의 전원적 풍토를 떠나 도시적 풍토로 돌아올 것입니다.”

전통풍수의 재정립과 도시풍수에 대한 새로운 조명 작업을 거의 끝냈다는 얘기로 들렸다. 특히 ‘도시풍수’ ‘도시 명당’이라는 새로운 개념정립으로 또 한번 풍수 대중화를 일으킬지 기대됐다. 역시 ‘대가’다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그도 많이 변해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교(경기고)때 공부가 하기 싫어 4․19탑에 놀러갔다 기인을 만나 풍수를 하게 됐다고 말해왔으나, 지금은 조금 달랐다.

“풍수에 관한 관심이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계기 때문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연이라 봐야겠지요. 물론 저도 우연이란 게 정말 존재한다고 믿지는 않아요. 우연의 저변에는 반드시 곡절이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도 풍수 공부의 방아쇠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떤 부문에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은 거의 반드시라 할 만큼 그쪽에 몰입하게 된 이유를 가지고 있더군요. 저는 그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풍수는 나의 숙명’이란 생각까지 하게 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시작 동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꼭 풍수 공부의 계기 같은 것이 떠오르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현재의 문제를 중시하는’ 풍수에 최선을 다하면서 금전과 명예는 무욕에 가까운 그가 부러웠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 두 가지가 상당할 정도로 비례할 것 같은데…. 그러다보니 문득 그가 왜 서울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왔는지 다시 궁금해졌다. 전해 듣긴 했지만 그와 친한 소설가와의 대화에서 그 이유를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최교수 기사가 그동안 언론에 얼마나 크게 보도됐습니까?” “보통 신문 한 페이지 정도로 나왔죠.” “그러면 최교수가 속한 단체는 어디입니까?” “대한지리학회죠.” “대한지리학회 기사는 어느 정도 크기로 나왔습니까?” “거의 1단 크기로 나왔죠.” “그러면 최교수는 지리학회 다른 교수들한테 미움 사고 공격받을 수밖에 없었겠네요.”

이 우스개 같은 대화가 많은 의미를 함축했다. 어떻게 보면 그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단순 명쾌하게’ 정리됐는지도 모르겠다.

92년 교수직을 그만 둔 그는 주로 집필활동만 했다. 모 대기업 자문위원으로 월급 받으며 그럭저럭 생활하고 있었다. 그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했으나 그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 풍수를 전공하시면서 후회한 적이 없었는지 물어봤다.


서울大에서 2년간 산악부 활동… 지금은 왼쪽다리 신경이상


“공부하면서 회의에 빠진 적은 수없이 많습니다. 간혹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대부분 제 성격 탓일 겁니다. 하지만 두 가지는 확실히 기억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명당은 당신 마음속에’라는 명제가 떠올랐을 때입니다. 만약 명당이란 것이 어느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속에서 품게 되는 형이상학적인 심리 작용의 결과라면, 풍수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저 수신(修身) 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이 부분에 대한 확답은 아직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큰 과제인데다가, 충분한 수신이 되었다 하더라도 땅은 땅대로 사람의 마음과는 다른 논리를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담아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본이 명당’이란 엉뚱한 가설 때문에 생긴 회의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 땅의 척추인 백두대간이 곳곳에서 끊기고 물길이 막힌 상황에서 전통적 의미의 명당이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현대적 의미의 명당이 필요해진 시대입니다. 이 논리를 좀 확장시키면 결국 ‘명당이란 찾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만들기 위해서는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풍수적 사고방식은 자본을 배척하는 성질이 분명 있습니다. 명당을 만들기 위한 자본이라, 풍수를 위한 반풍수(反風水)적 개념의 도입은 저를 충분히 회의에 빠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두 가지 회의를 해결하여 궁극적으로 <도시풍수> 혹은 <도시명당>이란 개념을 확인하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회의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오히려 발전을 위한 하나의 매듭이라 이해하고 있습니다.”

단순명쾌하게 ‘후회는 있었지만 남탓은 하지 않았다’였다. 역시 무욕의 소유자, 그대로였다. 풍수로 세상에 지식을 전하면서 인격적으로 세상에 청량감을 주고 있는 듯했다.

그런 그도 풍수 전문가들에 대해 나름대로 평가했다.

“풍수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세 부류가 있어요. 첫째는 아주 현학적인 척 하면서 사람들이 모르는 개념을 써가며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한테 그 개념이 뭐냐고 실제 물어보니, 자기도 정확히 모르고 있더라고요. 개념도 모르면서 일반 사람들을 가르치려하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일반인들도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아예 아무 말도 없이 자기 독단적으로 지휘하는 풍수 전문가들이 있어요. 사람들이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도 안합니다. 자기가 유아독존인 척하는 사람들이죠. 그러나 실제 그 사람들 하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고 물어보니, 근거가 없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르니 뭔가 있는 척 위장했을 수도 있는 겁니다. 셋째, 사람들이 물어보는 대로 성실히 답변해주면서, 이유도 자세히 설명해주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믿음이 가는 풍수전문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쩌면 모든 군속(群俗)들에게 하는 이야기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하고, 무욕적이면서 해맑은 표정의 소유자인 이 ‘풍수 대가’가 세상에 던지는 메시지 같기도 했다.

그의 이런 품성이 어디서 나왔을까?

유유자적하면서 여유있는 그의 자세는 영락없이 산이 보여주는 그 모습이다. 있는 듯 없는 듯 소리없이 보여주는 그 산 말이다. 언제부터 산을 좋아했으냐 물어보니 서울대에서 2년간 산악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의 취미란에도 항상 ‘등산’이라고 쓰여 있다.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봤다. 술자리에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다 써도 되냐고. “내가 어느 자리, 어느 순간에서건 내가 한 말은 한마디 빼지 않고 다 써도 괜찮다. 모든 게 내 책임이다.”

‘돌아서서 딴소리 않는’ 이 솔직담백하고 해맑은 ‘풍수대가’의 세상에 대한 외침으로 들렸다.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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