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법대 산악부 톱, ‘민법의 대가’ 되다

“산은 준비한 사람만 받아들이고, 인간의 오만을 용납하지 않는다.” “산은 인성 교육의 장이기도 하고,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도전 정신을 길러 준다.”

유명 산악인이 한 말이 아니다. 59년 서울대 법대 2학년 때부터 산악부 생활을 시작해 현재까지 산에 다니고 있는 충남대 전 대학원장 서민(徐敏 ․ 69) 교수의 오랜 경험담에서 우러나온 격언이다. 50년 동안 산에 다닌 관록을 압축한 것이다.

왜, 어떤 계기로 산에 가시게 됐냐고 물었다. “마음이 산에 있었겠지”라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 때 밧줄 메고 암릉 타며 산에 오르는 친구들의 모습을 우연히 보고 너무 부러웠다. 당시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있다가 2학년 올라가 ‘산에 같이 가도 되느냐’고 물어 산에 가게 됐다. 처음으로 록클라이밍을 했다. 당시에 등산하면 록클라이밍을 말하는 분위기였다. 힘들었지만 대단한 집중력을 요했다. 기분도 매우 상쾌했다. 집에 와서 하루 종일 잡념이 생기지 않았다. ‘아, 이 운동은 체력단련뿐 아니라 정신 수양에도 엄청난 도움을 주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이 때부터 산에 완전히 빠졌다. 매주말 오봉, 선인봉, 만장봉, 주봉, 인수봉 등 암릉을 오르내리며 록클라이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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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법개정위원장을 맡은 서민 교수가 성공회에서 잠시 포즈를 잡았다.

체력은 좋았다. 고교 시절 학교서 밤늦게까지 공부하다가 갑갑하면 철봉을 수평으로 잡고 턱걸이 30개는 거뜬히 했다. 록클라이밍의 기본 요건을 고교 때부터 기른 셈이었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힘도 충분했다.

“록클라이밍은 위험하지만 안전한 운동”이라고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그의 경험에서 우러난 격언과 맥을 같이 했다. 경솔하면 다칠 위험이 높고, 준비해서 신중하게 접근하면 사고 위험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주로 톱을 섰다. 힘과 기술에 자신 있었고, 그만큼 산에 빠져 있었다. 동기와 친구들은 법대생이면 누구나 하는 사법시험 공부로 차츰 빠졌지만 서 교수는 열심히 밧줄을 잡고 있었다. 그 밧줄이 결국 그의 인생 방향을 바꾸었다. 친구와 동기들은 공부에 빠졌지만 그는 후배를 데리고 톱을 서며 바위에 매달리는 일에 빠졌다. 서울대 단과대 산악부 연합으로 지리산 훈련 갔을 땐 학생 총대장을 맡기까지 했다.

열심히 톱을 서면서 죽을 뻔한 고비도 한 차례 넘겼다. 일봉에서 오봉으로, 오봉에서 일봉으로 오가며 자유자재로 암릉을 오르내렸지만 준비 안 된 방심은 한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주봉 K크랙을 오를 때였다. 수직 벽이다. 몸은 밖으로 나오고 손과 발만으로 바위틈을 붙잡고 올라야만 했다. 신발 상태를 확인하지 않았다. 바위 틈새로 손을 옮기고 발로 다시 자리를 잡는 순간 그대로 미끄러졌다. 다행히 세컨이 줄을 잡고 지탱해 주는 바람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세컨은 갑자기 휘감은 밧줄로 목에 화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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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대학원 시절 도봉산 주봉 밑에서 록클라이밍을 하던 시절 동료들과 함께.

그 날은 일단 철수하고 원인을 분석했다. 워크 앞 고무 부분이 다 닳아 있었다. 신발을 바꾸고 재도전해서 성공했다. 서울대에서 처음으로 올랐다. 얼마나 긴장했던지 일주일 이상 팔과 어깨에 근육통을 겪었다. 그의 50년 등산 역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다.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다.

사법시험 준비보다 밧줄을 더 열심히 잡은 그도 3학년 마치고 공부하기 위해 휴학했다. 그러나 다른 학생들은 이미 매주말 밤새워 공부했던 상태였고, 그는 뒤늦게 발동이 걸린 셈이었다. 공부한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모든 일이 그렇지만 시험도 노력을 기울인 만큼 결과가 나온다. 다행히 독일어 등엔 관심이 많아 원서를 들고 다니며 읽어도 막힘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원을 선택했다.

한국 사회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많다. “사법시험에 소홀하고 산에만 다닌 것에 후회는 없어요. 사회 활동하면서 산에 다닌 힘이 정신적으로 도움 된 측면이 많다고 봐요. 내성적인 성격을 활달하게 바꿔 주었죠. 인생 전체를 보면 플러스가 되지 않았나 생각해요. 산에 가서 좋은 사람들, 좋은 후배들을 많이 만났고요.”

대학원에서 석, 박사 과정을 마치고 75년 충남대 교수로 부임했다. “산 다니자”고 적극 나설 형편은 못됐다. 자리 잡고 가르치는 일부터 익숙해져야만 했다. 충남대로 추천한 은사님이 “5년은 참고 기다려라”고 했다. 서울로 옮길 기회가 오더라도 조금만 더 있어 라는 거였다. 못 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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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같은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

“산에 다니는 사람들 무의식중에 길러지는 것 하나가 의리입니다. 은사님의 체면도 있고 해서 서울의 6~7개 대학에서 오라는 제의를 받았지만 모교 같으면 가겠지만 다른 대학은 별 차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한편으로는 내가 맡은 분야만이라도 최고 대학으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의리로 눌러앉았다. 민법에 관한 한 최고가 되고 싶었다. 충남대 부임하기 전엔 법제처 조사위원회에 근무했었다. 실무에 관한 감각을 익혔다. 교수로 가서는 학교에서 주민 상대로 무료 법률상담소를 열어 법률 자문을 했다. 국민들의 법률 상담 70~80%가 민법이다. 주민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80년대 초반에 법무부 민법 개정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했다. 1999~2004년엔 두 번째 위원으로 참여해 실생활에 맞지 않은 민법을 지적했다. 올해부터 2012년까지 세 번째로 참여했다. 이번엔 위원장을 맡아 민법 개정 작업을 주도한다. 위원회는 대학교수, 판사, 변호사 등 민법 전문가 37명으로 구성됐다. 개정위는 58년 민법 제정 이후 한 차례도 전면 수정, 보완이 이뤄지지 않은 시대에 뒤떨어진 민법을 4년 동안 점진적으로 고칠 계획이다. 성인 기준을 만 19세로 낮추는 내용과 그에 따른 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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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대야산에서.

대전시 선거관리위원으로도 12년이나 활동했다. 대전고법 민사조정위원으로 10여년, 대전고검 보호관찰심사위원으로 6년 간 참여해 민법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97~2001년까지는 한국법사학회 회장을, 2000~2002년까지는 한국민사법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대학에서도 법대 학장(90~92년), 대학원장(2000~2004년) 등을 맡아 최선을 다했다. 그가 보직을 맡기 위해서 나선 적은 한번도 없었다. 대학원장 보직 때도 3월 2일 입학식 바로 전날 임명 통보를 받았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학사가 마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측에서는 맡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통보한 것이다. 그만큼 대내외적으로 신망이 두터웠다.

‘민법대가’의 업적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아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등산의 장점은 강인한 체력과 무한한 인내력을 무의식중에 길러지는 것 같아요. 힘든 일을 견디는 힘을 기르고, 참을성을 줍니다. 또 끈기를 배웁니다.”

산을 통해서 얻은 힘이다. “이 좋은 걸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기 위해 산으로 유도했는데, 잘 안되더군요. 한 학년만 성공하고, 이후 대학원 학생들을 데리고 산에 갔지요.”

그의 대학원 민법 수업은 등산 8학점이 더해졌다. 개강할 때, 종강할 때 산에 한번씩 가는 게 1학점이다. 물론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8학점을 안 받아도 졸업과는 아무 상관없다. 그러나 빠지는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1학기에 두 번씩, 아니 2학점씩 등산학점을 받았다. 대학원 4학기 동안 8학점을 산에서 정신적인 학점을 취득했다. 그 전통은 아직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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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지도 학생들과 함께 서대산을 올랐다.

다른 학생들이 민법 교실을 부러워 할 정도로 인기도 많았다. 산에 가본 사람은 안다. 술집에서 같이 보낸 사람보다 산에 한번 갔다 오면 훨씬 친근해 진다는 사실을. 힘든 일 같이 했다는 동료의식과 동질감을 가지게 된다. 술자리는 조금은 인위적이지만 등산은 자연과 함께 이해관계 없이 자연적으로 친숙해진다. 예를 들어 축구와 등산을 같이 한 팀들이 있었다 치자. 세월이 흐른 후 어느 팀이 계속 만날 확률이 높을까? 장담컨대 등산이 압도적일 것이다. 등산모임은 평생 간다. 서 교수도 대학원에서 같이 산에 다닌 제자들을 아직까지 만나고 있다. 그의 강권으로 외국 유학을 떠난 제자들은 전부 교수로 자리 잡고 있다. 다 산이 맺어 준 인연들이다.

“아마 단체로 산에 다닐 때는 협동심과 희생정신을 필요로 해서 그럴 겁니다. 서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으로 챙기고 애정을 가지면 헤어지더라도 꼭 다시 찾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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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개강 등산으로 학생들과 함께 계룡산 남매탑 인근에서.

재직 때도 산을 놓친 적은 없지만 대학 때보다 소홀했다. ‘그 좋은’ 산으로 학생들을 유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8학점’이라는 대학원 수업만 제대로 한 ‘절반의 성공’이었다. 교직원 산악회인 경산회 따라 산에 숱하게 갔다. 경산회는 이미 80년대 말 백두대간을 종주할 정도로 산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팀이었다. 경산회 주요 멤버는 70년대 후반 히말라야 원정대장을 맡았던 교수였다. 앞장 설 입장은 아니었다.

퇴직 후에도 산에는 계속 가고 있다. 그러나 산에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60세 들어 골프를 배웠다. 골프 치러 가는 만큼 산에 덜 가고 있다. 올해 다시 산에 자주 가리라 다짐하고 있다. 산은 그에게 인내과 끈기와 협동심과 희생정신을 심어 줬다.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덤으로 얻은 게 또 있다.

“75년 박사학위 논문 쓰고 긴장 풀어진 상태서 과음으로 몸살을 앓고 난 뒤 지금까지 병원신세 한번 진 적 없을 정도로 건강합니다. 다 대학 때 산에 열심히 다닌 덕분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후회는 않지만 아직 미련이 한 가지 있다. 서울에 일찍 올라왔더라면 좀 더 학문적으로 더 큰 도전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도전은 발전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산에 대한 도전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였다. 하물며 학문에 대한 도전에 나태했을 리 만무했다.

산이 너무 고마울 뿐이다. “등산은 일상생활의 일부 입니다. 산에 가면 활기를 느끼고 언제나 마음이 흐뭇하며 포근함을 줍니다. 덤으로 40년 가까이 병원신세 한번 진 적 없는 건강을 얻었습니다. 이 좋은 걸 왜 안합니까?”

My name is Garden Park. First name Garden mea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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